Saturday, November 28, 2015

모노누클레오시스 바이러스가 2008년에 페더러의 기량을 하락시켰다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는 전문가와 전·현역 선수들에 의해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 2009년 윔블던에서 우승함으로써 샘프라스(Pete Sampras)의 기록인 그랜드슬램 타이틀 14개를 넘어 역대 남자선수 중 가장 많은 타이틀을 획득한 선수가 되었으며, 2010년 호주 오픈에서 우승함으로써 그 기록을 16개로 늘렸다. 약점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테니스로 해마다 2~3개씩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차지하던 페더러는 2008년 들어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호주 오픈 4강전에서 조코비치(Novac Djokovic)에게 3대 0으로 지고, 프랑스 오픈에선 나달(Rafael Nadal)에게 6-0으로 세트를 내주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결국 그는 윔블던에서마저 나달에게 패하며 237주 동안 지켜오던 세계랭킹 1위를 빼앗겼다. 그 해 페더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EB바이러스 감염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B림프구

혈액은 액체인 혈장과 고체인 혈구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현미경 1,300배 확대 이미지
그 해 초부터 고열과 무기력증에 시달린 페더러가 병원을 찾은 건 호주 오픈이 끝난 뒤였다. 그가 받은 진단은 ‘Epstein-Barr virus (EB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단핵구증(infectious mononucleosis).’ 이 병을 알기 위해 잠깐 혈액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인간의 혈액은 액체 성분인 혈장(plasma)과 세포 성분인 혈구로 이루어져 있다. 혈장에는 단백질과 지질, 전해질 등이 있으며, 우리 몸을 보호하는 항체도 혈장에 있는 단백질의 하나다. 혈구 대부분은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고, 백혈구혈소판이 1% 내외를 차지한다. 혈소판은 혈액응고에 관여하며, 백혈구는 다른 병원균의 침입에 맞서 우리 몸을 보호하는 군대 같은 조직이다. 군대가 모자에 그려진 막대기 숫자로 계급을 구분하는 것처럼, 백혈구도 세포 안에 과립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립구와 비과립구로 나뉜다. 과립구의 대표인 호중구(neutrophil)가 백혈구의 54~62%를 차지하며, 세균 등의 병원체를 잡아먹어 세균이 퍼지지 않게 해준다.
비과립구의 대표인 림프구(lymphocyte)는 25~45% 정도며, 면역반응을 관장한다. 우리가 백신을 맞는 것도 알고 보면 림프구한테 그 병원체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인데, EB바이러스 감염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림프구, 그중에서도 항체를 만드는 B 림프구(B 세포)다.

EB바이러스는 침을 통해 전파된다

EB바이러스는 타액분비, 즉 침을 통해 전파된다. 이 대목에서 말을 할 때 유난히 침을 튀기는 주위 사람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침이 튄 게 내 입에 들어가 EB바이러스가 전파될 확률은 지극히 낮다. EB바이러스는 보다 친밀한 관계, 즉 감염된 성인이 키스해줄 때 옮겨진다. 그렇게 들어온 바이러스는 입 안의 여러 곳을 감염시키다 편도선으로 가서 B 세포와 접촉하는데, 평소에는 안 그러던 B 세포가 EB바이러스만 만나면 급히 흥분을 해버린다. 세균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야 할 B 세포가 우리 몸에 대한 항체를 만드는 것. 그것도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채로 말이다.
EB바이러스는 주로 침을 통해 전파된다(왼쪽). 헤르페스 바이러스과 중 하나인 EB바이러스의 10만배 확대사진(오른쪽)
그걸 놔두자니 심각한 상태가 벌어질 것 같아 우리 몸이 나름의 대응을 하는데, 그게 바로 헌병대에 해당하는 T 림프구(T 세포)를 출동시키는 것이다. 헌병대답게 T 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B 세포를 마구 제거하며, EB바이러스로 인한 증상은 대부분 이때 나타난다. EB바이러스 감염 때 혈액에는 이상하게 생긴 림프구가 많이 보이는데, 그게 바로 급히 동원된 T 세포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런 과정들을 통해 EB바이러스가 제거되나, 일부 B세포는 여전히 이 바이러스를 갖고 있고, 이건 평생 지속된다. 면역이 약한 사람에게선 B 세포의 증식이 계속되어 암이 생길 수도 있는데, 버킷림프종(Burkitt's lymphoma)은 그 한 예다.

잘 사는 선진국에서는 전염단핵구증을 자주 볼 수 있다

인체의 현병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T림프군. 전자현미경 9,560배 확대사진
EB바이러스 감염은 전 세계에서 발생한다. 성인의 90%가 이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가질 만큼 흔한데, 어린아이들에서 가장 흔하지만, 다행히도 이때는 대부분 무증상이거나 가벼운 인두염으로만 나타난다. 그다음으로 흔한 그룹은 역시 키스를 많이 하는 청소년과 젊은 성인으로, 이들의 75%가 전염단핵구증 양상을 보인다. 위생상태가 좋지 않은 나라에서는 EB바이러스가 대개 어린 나이의 소아에 감염되는 반면 잘사는 나라들에선 성인이 될 때까지 EB바이러스 감염이 되지 않으니, 전염단핵구증을 더 자주 볼 수 있는 곳은 이들 선진국이다.
젊은 성인에서 전염단핵구증의 잠복기는 약 4~6주다. 피로와 근육통이 1~2주 지속하다 발열, 인후통림프절이 붓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주로 목 뒤에 있는 림프절이 붓고 아프며, 이건 우리 몸에서 T세포를 다량으로 만들어내는 것과 관계가 있다. 발진이 생기기도 하며, 간과 비장이 커지기도 한다.
이런 증상들은 2~4주간 지속하며, 권태감과 집중력 저하 등은 수개월까지 가기도 한다. 대부분 자연 치유되나 일부 환자에서는 합병증이 생기기도 하는데, 뇌를 침범한다든지 적혈구가 깨져 빈혈이 생기기도 한다. 합병증으로 간염이 발병하기도 해, 2009년 국내 논문에는 전염단핵구증에 걸린 20대 남자에서 급성 간염이 생긴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비정상적으로 림프구가 증가하면 전염단핵구증을 의심해야…

건강한 성인의 혈액에는 1mm3당 4,500-10,000개 정도의 백혈구가 있다. 전염단핵구증에 감염 시 백혈구 수치가 10,000개를 넘어 20,000개에 이른다. 특히 림프구가 증가하는데, 그 중 10% 이상이 비전형 림프구로, 크기도 크고 불규칙한 핵을 가지고 있다. 이 질병의 이름이 전염단핵구증인 건 림프구가 많이 증가하는 데 기인한다. 열이 있고 인두염과 부은 림프절이 있는 성인에서 비정상적으로 생긴 백혈구가 많이 관찰된다면 전염단핵구증을 의심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비장까지 커졌다면 진단에 도움이 된다. 과거에는 항체검사도 했지만 위음성, 즉 전염단핵구증에 걸렸는데도 양성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 유용성이 떨어진다. 최근에는 트랜스아미나제(transaminase)라는 간 효소가 80%에서 증가하여 진단에 널리 쓰인다.

전염단핵구증의 치료제의 개발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치료는 휴식과 진통제다. 잘 쉬면 대부분은 병이 낫는다. 첫 한 달은 비장이 터지는 걸 막기 위해 과도한 활동을 피해야 한다. 염증이 심하면 항염 작용이 있는 스테로이드를 쓰고 싶겠지만, 이 경우 세균 감염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피하는 게 좋다. 단 편도선이 너무 커져 기도를 막는다든지, 적혈구가 깨진다든지 할 때는 프레드니졸론(prednisolone)을 쓸 수는 있다. EB바이러스는 헤르페스 바이러스(herpes virus)와 같은 과에 속하지만, 헤르페스에 잘 듣는 아시클로버(acyclovir)는 효과가 없다. 그러니 전염단핵구증의 치료는 그저 면역억제제의 사용을 줄이는 게 고작이다. 키스가 아니면 전염되기 어려우니 격리를 할 필요까진 없지만, 혹시 모르니 음식을 앞에 두고 침을 튀기며 말하는 건 주의를 줄 필요가 있다. 아무튼 EB바이러스의 치료약은 현재로선 없는 상태인데, 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EB바이러스는 타액에서 주로 증식하므로 약을 먹어봤자 그 효과가 미치지 않으며, EB바이러스의 증세가 바이러스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몸의 면역반응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EB바이러스가 심각한 증상을 일으키고 심지어 암과도 관계가 있는 만큼 제대로 된 치료약의 개발이 필요하다.

황제 페더러, EB바이러스를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복귀하다

EB바이러스를 극복하고, 2010년 호주 오픈 우승을 차지한 로저 페더러
EB바이러스가 드문 질환이 아닌 만큼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환자를 찾을 수 있다. 작년 올림픽에서 박태환과 경쟁을 했던 해켓(Grant Hackett)도 2000년 올림픽 즈음에 EB바이러스에 시달린 바 있는데, 그래서 그다음 올림픽 때는 아내와 키스도 하지 않을 만큼 조심을 했단다.
‘어뢰’라는 별명을 얻었던 수영스타 이안 소프(Ian Thorpe)가 이른 나이에 은퇴한 것도 EB바이러스를 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안 소프와 달리 페더러는 EB바이러스를 극복했고, 2009년 2개의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차지하며 다시금 세계랭킹 1위에 복귀했다. 어려운 병을 극복하고 다시금 세계 일인자가 된 그에게 박수를 보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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