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11, 2016

미국은 프랑스에서 음악을 배우고, 많은 음악가들이 유럽나라들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유럽의 음악가들이 클래식음악을 원시재즈음악에 접목시켰다.

유럽과 아프리카로부터 온 사람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딛었을 때 음악도 함께 상륙했다. 이들의 음악은 곧 자연스럽게 결합되었고, ‘미국 음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유럽인의 후예




‘민스트럴 쇼’(minstrels)

‘클래식’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비교적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는 클래식 음악이라는 표현이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초의 미국인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라는 점에서, 초창기 미국 문화는 아메리카 대륙에 이식된 유럽 문화의 연장선이었다. 실제로 19세기 미국의 젊은 음악도들은 자신들의 뿌리인 유럽, 특히 독일로 유학을 떠났으며, 미국에서는 유럽의 음악을 연주하거나 혹은 이를 모방하여 작곡했다.

당시의 모방작 대부분은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맥도웰, 비치, 풋, 채드윅 등 ‘보스턴 6인조’라고 불렸던 이들의 완성도 높은 작품들은 요즘에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맥도웰은 리스트의 후원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오늘날에도 ‘피아노 협주곡 2번’ 등 그의 피아노 작품들이 자주 연주되고 있다. 비치는 미국에서 직업 음악가로서 성공한 첫 여성으로, 그녀의 실내악 작품들은 전통적인 실내악 연주자들의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서민들에게는 클래식보다는 오락적인 음악극이 인기가 있었는데, ‘민스트럴 쇼(minstrels)’가 그 중심에 있었다. 이 쇼는 백인들이 흑인 분장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일종의 풍자극으로, 미국만의 독특한 공연이었다. ‘미국 음악의 아버지’ 스티븐 포스터가 바로 민스트럴 작곡가였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오! 수재너’가 그의 대표적인 민스트럴 노래이다. 민스트럴 쇼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드뷔시는 ‘전주곡 1권’ 마지막 곡으로 ‘민스트럴’을 넣어 관심을 표시했다. 포스터는 이외에도 ‘나의 켄터키 옛집’, ‘올드 블랙 조’ 등 ‘팔러 뮤직(parlor music)’이라고 불리는 대중가요로 사랑을 받았다.

아프리카인의 후예



미국에는 유럽계만큼 아프리카계도 많았다. 그들은 서아프리카에 뿌리를 두었을 독특한 음계와 독특한 리듬으로 자신의 애달픈 처지를 노래한 ‘블루스’를 즐겼다. 그리고 기악곡으로는 ‘래그타임(ragtime)’이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래그타임은 ‘울퉁불퉁한 박자’라는 의미로, 저음 성부의 규칙적인 리듬 위에 당김음 리듬의 멜로디를 얹은 특징을 갖고 있다. ‘래그타임의 왕’이라고 불리는 조플린은 피아노를 위한 래그타임과 오페라 ‘트리모니샤’ 등을 남겼다. 생전에는 ‘단풍잎 래그’가 유명했지만 오늘날에는 이 곡보다는 ‘엔터테이너’와 ‘이지 위너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래그타임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특히 유흥을 즐기던 벨 에포크 시절의 파리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누렸다. 스트라빈스키의 래그타임 사랑은 노골적이었으며, 드뷔시도 ‘어린이 차지’에서 래그타임의 일종인 ‘케이크워크’를 썼다.

래그타임은 20세기로 넘어가면서 ‘재즈’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재즈의 어원과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루이지애나 지역의 프랑스계와 아프리카계의 혼혈인 ‘크리올(creole)’이 주도했던, 블루스와 래그타임을 혼합하고 즉흥 연주를 중요시하는 음악을 ‘재즈’의 시작으로 본다.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의 음악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흥 문화의 쇠퇴로 미시시피강을 타고 시카고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재즈는 동쪽으로 뻗어나가 뉴욕에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1920년대가 되어 ‘재즈의 시대’리고 불리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즉흥을 중요시하는 뉴올리언스-시카고 재즈에는 루이 암스트롱이 있었으며, 빅밴드를 위한 편곡을 중요시하는 뉴욕 재즈에는 듀크 엘링턴이 있었다. 이후에는 스윙, 비밥, 프리 재즈 등 다양하게 변모했다.

유럽으로부터



첫 세계대전이 재즈의 확산을 이끌었다면, 두 번째 세계대전은 유럽 음악가들의 미국 정착을 유도했다. 망명객들은 미국 음악가로서 미국 음악을 적극적으로 탐구했으며, 그 결과 재즈는 그들의 음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버르토크는 빅밴드의 선두주자였던 베니 굿맨을 위해 ‘콘트라스트’를 썼으며, 스트라빈스키는 클라리넷과 재즈 밴드를 위한 ‘에보니 협주곡’으로 미국의 음악가임을 천명했다. 쿠르트 바일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작곡가로 활약했다.

반면에 쇤베르크 등은 유럽의 음악을 전파하면서 유럽적인 음악을 추구하던 작곡가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특이한 것은 유럽에 있을 때에 재즈에 관심이 많았던 마르티누와 크레네크, 슈테판 볼페는 정작 미국 이주 후에는 현대적 음악에 몰두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속에서는 오히려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유럽의 음악가들이 미국으로 많이 오기도 했지만, 여전히 미국의 많은 젊은 음악가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들이 택한 곳은 나치 독일 대신 프랑스 파리였으며, 이곳에서 나디아 불랑제의 가르침을 받았다. 불랑제는 학생들이 기존 거장들의 악풍을 이어가기 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을 찾도록 지도했다.

‘미국적’이라 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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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거슈윈

윌리엄 그랜트 스틸

그렇다면 20세기 초 미국의 작곡가들은 미국적인 음악을 어디서 찾았을까? 역시 재즈였다.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재즈는 분명 미국에서 자생한 미국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위대한 이름 조지 거슈윈을 만나게 된다.

거슈윈은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지만 그가 일하던 ‘틴 팬 앨리’에서 출판한 ‘스와니’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일약 슈퍼스타가 되었다. 그는 민스트럴의 후예로서 뉴욕에서 이제 막 태동했던 뮤지컬 분야에 주력하면서 뮤지컬을 대중음악의 주류로 올려놓았다.

그러면서도 파리에서 불랑제에게 수학한 클래식 작곡가로서 클래식 작품을 쓰려고 노력했다. 뉴욕의 빅밴드 재즈와 클래식의 위대한 만남 ‘랩소디 인 블루’는 그 노력의 블록버스터급 결과물이었다. 이외에도 ‘피아노 협주곡’, 관현악곡 ‘파리의 아메리카인’, 오페라 ‘포기와 베스’, 피아노곡 ‘세 개의 전주곡’, 현을 위한 ‘자장가’ 등 클래식 레퍼토리를 남겼다.

클래식과 재즈의 결합이라면 잊지 말아야할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윌리엄 그랜트 스틸이다. 그는 다섯 개의 교향곡과 여덟 개의 오페라 등을 작곡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클래식 작곡가로 언급된다. 그는 재즈뿐만 아니라 ‘파나마의 춤’과 같이 다양한 민속적 소재로 정규 클래식 편성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하지만 미국에는 재즈만 있지는 않을 터, 불랑제의 제자였던 아론 코플란드는 이러한 줄타기에서 자신의 색깔을 찾았다. 그도 물론 재즈를 수용했지만 카우보이의 음악과 시골의 컨트리 뮤직 등 백인의 민속음악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애팔래치아의 봄’, ‘교향곡 3번’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음악은 미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스턴, 버질 톰슨, 로이 해리스, 새뮤얼 바버, 윌리엄 슈만, 다이아몬드, 퍼시케티 등도 미국적인 심포닉 사운드를 선보였다. 이들은 대체로 신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아방가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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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TV 첼로’(왼쪽)와 비디오조각 ‘존 케이지’(오른쪽)

미국은 대중예술의 산실이었지만 실험의 도가니이기도 했다. 일찍이 1918년에 프랑스의 모더니스트 바레즈가 미국에 건너가 미국의 현대음악을 이끌었으며, 세션스, 크로포드 시거, 엘리엇 카터, 밀튼 배빗 등 뛰어난 작곡가들이 세계적인 현대음악의 흐름에 발을 맞추었다.

물론 미국만의 새로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활동의 정신적 지주는 바로 찰스 아이브즈였다. 그의 음악은 찬송가나 민요 등을 꼬아놓은 멜로디, 사람이 연주할 수 없는 피아노 반주, 어울릴 수 없는 여러 선율의 혼재, 럭비공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화음 등 연주를 위해 만든 곡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20세기 초 전위적인 활동으로 이름을 떨친 헨리 카웰에 의해 ‘발견’되면서 미국 아방가르드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아방가르드 활동은 존 케이지, 백남준 등으로 대표되는 뉴욕 플럭서스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들은 ‘삶이 곧 예술’이라는 모토로 일상적인 사물을 소재로 위트 있게(혹은 가혹하게) 재해석하여 표현했다. 또한 존 케이지를 비롯하여 동양의 이국적인 음악에 심취했던 콜린 맥피, 헨리 카웰, 루 해리슨 등은 후배들에게 새로운 음악적 소재를 공급했다.

오늘날




뱅온어캔의 ‘아스팔트 오케스트라’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결합은 20세기 후반에도 주요 관심사였다. 폴 쇼언필드는 포크송을 클래식에 접목시켜 인기를 끌었으며, 윌리엄 볼컴은 ‘순수와 경험의 노래’에서 미국의 모든 음악 스타일을 집합시켰다. 도허티는 이 둘 사이에 균형 잡힌 줄타기의 명인이다. 반면에 미국주의 사운드의 후계자들인 록버그, 로렘, 하비슨 등은 유럽풍의 신낭만주의에 더욱 기대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멜 파월, 라우즈, 대니얼푸어, 히그던 등은 현대적인 음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현대적인 실험정신은 다소 주춤했다. 조지 크럼과 같은 성공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라이시, 글래스 등이 당돌하게 내놓은 반복구조음악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흔히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리는 이 음악은 존 애덤스, 마이클 토크 등의 포스트-미니멀리즘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뱅온어캔’으로 대표되는 뉴욕의 길거리 음악과도 만난다.

이러한 동시적 다양성이야말로 오늘날 미국 음악의 주요 특징에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성이 개인에게 나타나기도 한다. 번스타인, 코릴리아노, 존 존, 메이슨 베이츠 등과 같이 스타일을 넘나들며 음악 자체를 탐닉하는 ‘자연적인 음악가’들에게 장르를 논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결국 오늘날 미국의 작곡가들은 어떠한 음악을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하고 싶은 음악, 잘 알고 있는 음악,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음악. 불랑제의 가르침이다.



'2016.8월 Program In-depth Note' 시리즈 보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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