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28, 2016

송국리 문화

삶과 죽음의 공간이 공존한 청동기시대의 마을 구조

대지조성을 위한 성토 공사, 의례 공간과 주랑柱廊 형태의 대규모 접근시설 등은 청동기시대 다른 유적에서는 볼 수 없는 송국리유적의 대표적인 특징이며, 그 규모와 취락 구조적인 면에서는 독보적인 유적이다.


송국리유적과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영위함으로써 개인 노동력의 한계를 극복해 왔다. 공동생활은 야생 식물의 채집이나 사냥은 물론, 작물의 재배와 동물의 사육 등 식량을 확보하고 생산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효과를 드러냈다. 한반도의 인류는 신석기시대부터는 땅을 파고 집을 짓고 한데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청동기시대의 마을유적은 전국 각지에서 그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특히 부여 송국리유적은 그 규모와 구조적인 면에서는 독보적인 마을유적이다.

청동기시대 중 일정기간 한반도 중남부 전역에 걸쳐 성행한 농경문화를 ‘송국리문화松菊里文化’라 일컬을 뿐만 아니라, 송국리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집자리住居址나 토기에 ‘송국리형松菊里形’ 또는 ‘송국리식松菊里式’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누구나 한번 쯤 송국리유적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뿐 아니라 한국의 선사문화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유적이다. 그만큼 송국리유적의 상징성은 매우 강하다.

송국리유적, 어떤 곳인가?

많은 발견이 그러하듯, 송국리유적도 우연한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그 상황은 매우 극적이었다. 1974년 지역 주민의 제보에 의해 발굴조사된 돌널무덤石棺墓에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돌칼石刀, 돌화살촉石鏃, 대롱옥管玉 등의 껴묻거리副葬品가 나왔다. 이 중 비파형동검은 금강유역이 한반도 중・남부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임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되었다.

송국리유적에 이목을 집중시킨 돌널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ㆍ대롱옥 등의 껴묻거리가 확인되어, 목책으로 둘러싸인 대규모 마을을 세울 만큼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수장의 무덤으로 주목되었다.


1975년 농지확대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송국리유적이 자리잡은 구릉 약 450,000㎡가 개간 대상지역에 포함됨으로써 3년에 걸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당시, 모양이 원형이고 중앙에 돼지코처럼 두개의 기둥 구멍이 있는 집자리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알려짐으로써 ‘송국리형 집자리’로 불리게되었다. 이 외에 방형의 집자리도 확인되었는데, 여기서는 불에 탄 볍씨가 많이 나와 송국리 사람들이 쌀농사를 지었음을 알려 주었다. 1980년대에는 좁은 면적에 밀집해 있는 집자리들이 많이 확인되었다.

송국리유적을 청동기시대 ‘대규모 마을’로 보는 인식은 1990년대 초반부터 전개되었다. 집자리들이 자리 잡은 구릉의 가장자리를 따라 열을 이루고 있는 일련의 큰 구덩이柱穴들이 발견되었는데, 확인된 것만 450m에 이른다. 이 구덩이 열은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통나무 울타리 즉 목책木柵의 기둥을 세웠던 구덩이로 알려졌다. 목책에는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는 물론 외부에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수십 개의 통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비스듬히 박아둔 녹채鹿砦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송국리유적은 견고한 방어시설을 갖춘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마을, 즉 방어취락防禦聚落이었던 것이다. 사실 방어취락은 이 조사가 시행되기 직전 울산 검단리유적에서 수십 기의 집자리가 거대한 도랑還濠에 둘러싸인 모습의 마을유적이 발견되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었다.

송국리유적에서는 경사면에 흙을 밀어 넣는 성토작업을 통하여 구릉 위의 활용공간을 넓히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진 점도 밝혀졌다. 이렇게 조성된 대지에 집을 짓고 목책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공사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므로 매우 강한 지도력을 갖춘 수장首長이 송국리에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바로 비파형동검과 함께 묻힌 돌널무덤의 주인공이 유력한 후보로 지목된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기원전 10~5세기경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야요이문화彌生文化가 형성되었는데, 집자리는 물론 토기ㆍ마제석기・각종 건축물・환호・논 그리고 무덤에 이르기까지 송국리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 밝혀지게 되었다. 송국리유적은 그 기원지로서 국제적인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청동기시대 주거 변천과 부여 송국리유적 집자리의 의미

송국리문화 이전의 청동기시대 집자리
한반도의 청동기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뚜렷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남한의 경우만 본다면 대략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600~300년경까지 약 1,000년 이상 지속된 것으로 본다. 이 기간 동안 대륙에서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기도 하고 한반도 내에서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구조와 도구도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송국리문화가 시작된 연대는 아직 분명치 않으나, 전국 발굴현장에서 채취한 시료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치를 취합한 결과 대략 기원전 900년경에 시작되어 발전을 이루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원전 700년경 이후에는 송국리유적을 중심으로 가장 발달된 모습을 보이며, 각 지역마다 긴 시간동안 마을이 유지되면서 지역적 색채도 가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안 불당동유적(왼쪽)과 연기 송원리유적(오른쪽)의 세장방형 집자리. 송국리문화 이전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역삼동유형(왼쪽)과 가락동유형(오른쪽) 집자리가 두 축을 이루었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로 가장 오래된 것은 방형方形 집자리 내에 돌로 바닥과 주위를 둘러 만든 화덕자리爐址를 갖춘 집자리인데, 하남 미사리유적에서 처음 알려졌다. 송국리문화 이전의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긴 장방형長方形의 집자리가 유행하였다. 벽을 따라 기둥을 세웠고 집자리 중심축 선에 한개 또는 다수의 화덕자리가 있으며 저장용 구덩이가 설치된 것이 많다.

기둥을 설치하는 방법이나 내부에 갖추어진 시설의 구조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발견된 유적의 이름을 따서 가락동유형(둔산형), 역삼동유형(관산리형) 등으로 불린다. 가락동유형 집자리는 벽을 따라 세운 기둥의 받침으로 네모난 돌을 사용하였고, 화덕자리도 돌을 돌려 세워 네모모양으로 만들었다. 겹아가리에 빗금무늬二重口緣短斜線文를 새긴 토기가 많이 나온다. 이에 비해 역삼동유형 집자리는 구덩이를 파고서 기둥을 세웠으며 화덕자리는 맨바닥을 그냥 쓰거나 얕은 구덩이를 파서 만들었다.

구멍무늬토기孔列文土器나 톱니입술토기口脣刻目土器, 붉은 간토기赤色磨硏土器가 주로 출토된다. 그러나 석기는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집자리는 화덕자리를 중심으로 방을 나누어 가장家長과 자식들 세대가 공동으로 거주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족 구성원의 증가에 따라 집을 증축한 예도 발견된다.

송국리문화의 집자리
청동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로 분류되는 송국리문화의 집자리는 전기에 비하여 현저하게 작아진다. 이는 여러 가구가 한 집에 공동으로 거주하는 방식으로부터 소형집자리에 세대가 분가하여 거주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상은 경기 남부 이남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되는 송국리문화의 분포권뿐 아니라, 집자리의 구조와 유물의 구성이 다른 강원 영서와 영동・동남해안 지역 등 남한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청동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로 분류되는 송국리문화의 집자리는 한 세대가 거주할 정도로 소형화된다. 송국리형 집자리는 중심부에 타원형 구덩이와 두 개의 기둥구멍이 있는 점이 특징인데, 평면형태가 방형인 것과 원형인 것이 있다. 전자를 휴암리식, 후자를 송국리식이라 부른다. (사진은 서산 송국리 14호 휴양리식 집자리(왼쪽) 송국리 68호 송국리식 집자리(오른쪽))


송국리형 집자리란 중심부에 타원형 구덩이와 두 개의 기둥구멍이 있는 구조를 일컫는데, 집자리의 형태가 원형인 송국리식과 방형인 휴암리식으로 구분된다. 중앙부의 타원형 구덩이를 화덕자리로 보는 의견도 있지만, 화덕자리가 확연히 눈에 띄지 않는 점은 송국리형 집자리의 큰 특징이다. 송국리형 집자리의 등장 과정과 기원지를 밝히는 문제는 청동기시대 연구자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지만, 전기의 역삼동유형 집자리가 점차 변화하여 소형화된 것으로 보는 의견과 그와 관계없이 등장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맞선다.

역삼동유형 집자리가 변화된 것으로 보는 의견에서는 방형의 휴암리식 집자리가 먼저 등장하고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가 뒤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집자리에서 나온 토기를 비교한 결과, 휴암리식(방형) 집자리에서 나온 토기들이 송국리식(원형) 집자리 출토품에 비해 먼저 제작된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송국리유적에서 발굴된 집자리는 원형과 (장)방형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원형은 이름 그대로 송국리식이다. 방형 집자리는 바닥을 오목하게 파고 만든 둥근 화덕자리를 갖추고 있고 벽을 따라 기둥을 세운 흔적도 확인된다.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와 두개의 기둥 구멍이 없어 휴암리식이라 불리는 송국리형 집자리와는 다른 형태이다. 특히 장방형 집자리 중에는 길이가 14m에 이르는 대형급도 있다. 집자리들이 겹쳐 있는 상태가 확인된 예는 많지 않으나,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가 장방형 집자리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예가 있다. 또 방형 집자리를 파괴한 후 장방형 집자리가 축조된 경우도 확인되므로, 송국리유적에서 집자리가 만들어진 순서는 대체로 방형→장방형→원형으로 파악되고 있다.

집자리의 모양에 따라 위치와 배치 방법에 차이를 보인다. 방형과 장방형 집자리들은 주로 구릉 상부의 평탄한 대지에 자리를 잡은 반면 원형 집자리들은 경사면에 모여 있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큰 것과 작은 것 2기가 짝을 이루고 있다.

송국리유적 28호(왼쪽), 23호 집자리. 송국리유적에서는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 외에 방형과 장방형 집자리도 많이 확인된다. 이들은 중심부에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구멍이 없고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화덕자리가 있어, 송국리형(휴암리식) 집자리와는 다른 구조이다. 장방형 집자리 중에는 길이가 14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러한 배치 상황을 보면, 방형・장방형 집자리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원형 집자리에 살았던 사람들의 토지 이용방식이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송국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일까, 아니면 대지 이용방식을 수정해야 할 어떤 사회적 필요성이 생긴 것일까?

청동기시대 송국리 마을의 이모저모

방어시설
송국리유적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마을 전체가 목책木柵, 즉 통나무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점이었다. 일본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유적에서는 마을 주위를 감싼 거대한 도랑環濠이 알려져 있는데, 이 도랑의 가장 큰 기능은 마을의 내부를 구획하거나 방어를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울산 검단리ㆍ창원 남산유적 등이 그 기원에 해당한다. 그런데, 도랑이 아닌 목책을 세워 마을을 방어한 유적은 송국리가 유일하였다. 특히 목책은 서쪽으로 돌출된 가지능선에서 시작되어 유적이 분포하는 구릉과 곡간부를 아우르는 대규모 시설로서, 내부 면적이 작게는 300,000㎡, 크게는 610,000㎡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 목책은 방형 집자리와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 목책을 파괴하고 만들어진 도랑溝의 일부도 확인되는데, 원형 집자리가 군집을 이룬 마을을 둘러싼 시설로 알려졌다. 이로써 송국리유적은 방형 집자리가 중심을 이룬 마을일 때는 목책, 원형 집자리가 중심이었을 때는 도랑環濠으로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이 가설은 송국리유적의 변화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의 근간을 이루었다.

의례공간, 묘역, 주거구역의 구획
그런데 목책 주변을 확대 발굴한 결과, 목책이 지나가는 대지의 유적분포 양상이 밝혀지면서 송국리유적의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본래 한 줄이라 알려져 온 1열의 목책 기둥 구멍과 나란한 기둥 구멍열이 하나 더 확인되면서 목책이 아닌 대형 건물터로 판명된 것이다. 길이 22~24m의 12칸 규모의 대형 건물은 견고한 통나무 담장인 울책鬱柵으로 둘러싸여 있고, 건물과 담장 사이에는 넓은 마당을 두었다. 담장에서는 폭 1m 내외의 좁은 출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시설은 대지의 남・북에 각각 1기씩 있었는데, 북쪽의 것이 먼저 사용되다 폐기된 다음 남쪽에 고쳐 만든 것이다. 대지의 남쪽 혹은 북쪽에 건물이 있을 때 다른 한 쪽은 넓은 광장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은 또 하나의 통나무 담장으로 외부 공간과 구분되었다. 이 시설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비좁은 출입구를 통과해야만 했다. 이로써 견고한 담장으로 대형 건물과 마당前庭 및 광장廣場을 둘러친 일종의 ‘특수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송국리유적의 의례공간. 돌출된 능선의 대지 남쪽과 북쪽에 있는 대형 지상 건물터 2기. 건물앞에는 마당이 있고 주위를 견고한 통나무 담장으로 감쌌다. 농경 의례공간 혹은 곡물의 창고로 추정된다. 이 시설의 동쪽 높은 지대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증축한 지상건물터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수공간’의 기능은 무엇일까? 단서는 유적 내 이 시설의 위치와 다른 유구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송국리유적에는 집자리들의 분포 밀도가 매우 높지만 이 시설 내부에는 집자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 2기가 확인되긴 했지만 이 시설이 폐기된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시설은 일반 집자리들이 모여 있는 대지와는 구별된 특수 공간인 셈이다. 둘째, 이 공간의 남쪽 능선 정상부에는 비파형동검이 부장된 돌널무덤를 비롯하여 널무덤, 독무덤 등이 조성되어 있다. 송국리 취락의 최고위 인물, 즉 수장首長과 그 일족의 무덤 공간이다. 이와 같이 주거 공간과 무덤 공간이 구분된 취락 내에서 이러한 특수 공간의 성격을 추정해 볼 때, 가장 유력한 것은 제의를 거행했던 공간으로 보는 것이다. 담장과 좁은 출입구를 통하여 대형 건물과 마당 및 광장에 들어갈 수 있는 지위(계급)와 인원은 극도로 통제되었을 것이다. 송국리 취락의 경제적 기반이 농경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공간에서 거행된 의례의 1순위는 농경의례였을 것이다.

이 건물은 활동공간이 지상에 있거나 정자처럼 마루를 높게 띄운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후자의 경우 통풍을 필요로 하는 곡물 저장에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종자의 보존이 매우 중요했던 만큼 이 건물과 같이 통제된 공간에 보관하고 특별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 건물의 담장 안쪽에는 망루를 세워 감시를 위해 보초가 적절하게 배치되었을 것이다. 이 대형 건물은 제사장이 의례를 집전하는 중심 건물이지만, 농경으로 수확한 곡물의 저장고 역할도 겸하였을 것이다.

구릉 위의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는 방형과 장방형 집자리들이 즐비하다. 원형 집자리 대부분이 구릉의 사면부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점과 대비된다. 앞서 살핀 의례공간 내에 (장)방형 집자리가 없는 점에 비추어 보면 평탄한 대지 상부는 주로 주거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건물을 감싼 울책. 울책에는 폭 1m 내외의 좁은 출입구를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으며, 울책 안쪽에는 감시를 위해 망루를 세웠다.
길고 긴 주랑柱廊의 정체
이 대지의 서쪽 언저리에도 목책이 일렬로 설치되어 북쪽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목책과 주변 시설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하여 기존에 발굴한 부분을 넓게 발굴하니 한 열이 아니라 두 열의 기둥 구덩이열柱穴列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기둥열은 완벽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기둥자리의 배치 간격도 일치한다. 게다가 구덩이 바닥에 큰 돌이 박혀 있는 것이 적지 않았는데, 돌의 윗부분을 쪼아 오목하게 만든 것도 있다. 기둥의 받침돌礎盤石이 분명하다. 이 구조물은 완전하게 확인된 것만 98m이고, 기존에 목책으로 알려진 길이를 합하면 227m가 된다. 다소 불확실한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100m가 넘는 이 구조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두 줄의 기둥열은 하나의 구조물임에 틀림없으며, 받침돌이 있는 점으로 보아 지붕을 갖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간에 단절된 부분이 보이지 않으므로 주랑柱廊과 같이 긴 건축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설이 남서쪽으로 연장될 경우 앞서 살핀 의례공간 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대지 언저리에 있는 지상건물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유적의 북동쪽 모처에서 의례공간 쪽으로 이어지는 연결통로의 기능을 가진 구조물일 가능성이 높다. 일종의 접근시설인 셈이니 의례공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종래 취락을 감싸는 목책으로 알려져 온 목주열은 두 열이 짝을 이룬 구조로 밝혀졌다. 확인된 길이만 98m이며 기존에 조사된 길이를 합하면 총 연장 227m에 이른다. 의례공간으로 연결되는 주랑이 아닐까?

목주시설의 배치 상태. 일부 구간에서는 보다 먼저 사용된 목주시설이나 집자리와 겹쳐있다.


주거공간의 변화
한편, 대지의 집자리들은 이 구조물과의 선후관계에 따라 시기가 나뉜다. 이 목주시설은 대지의 언저리를 따라 설치되었는데 이 부분은 경사면을 매립하여 확장된 것이다. 이 매립토 내에 화재 폐기물을 비롯한 유물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성토 공사 이전에도 집자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시설과 동시에 존속했던 집자리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도랑을 파고 통나무 담장을 세워 구획한 공간에는 지상건물도 구축되었다. 이후 이러한 시설이 폐기된 다음에도 다시 집자리가 들어섰다. 특히 목주시설 이전 혹은 같은 시기의 집자리는 방형이거나 규모가 작은 장방형이며, 그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집자리는 규모가 비교적 큰 장방형 집자리들이다.

방형·장방형 집자리와 원형 집자리가 겹쳐진 모습. 송국리유적에서 원형인 ‘송국리형 집자리’는 방형과 장방형 집자리 보다 늦게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형 집자리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한 원형 집자리는 대부분 경사면에 지어졌는데, 이러한 취락은 도랑 즉 환호環濠로 둘러싸인 방어취락일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현재까지 환호의 존재는 다소 불확실하다. 집자리 외의 넓은 토지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는 미지수이다. 이와 같이, 송국리유적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변화를 겪으며 존속해 왔다. 하지만 중심 시기는 특수 시설로 구성된 ‘의례 공간’이 만들어진 시기로, 100m가 넘는 목주시설도 이때 만들어졌다. 최고 수장급 인물과 그 가족의 무덤공간도 전망 좋은 곳에 조성하였으며, 이런 주요 시설과 겹치지 않는 대지가 주거구역이었을 것이다.

한편, 원형 집자리는 시기적으로 방형이나 장방형 집자리보다 늦게 등장하여 송국리유적의 주류적인 집자리가 되었다. 목주시설이 폐기된 이후 장방형 집자리들이 대지 평탄면에 들어섰을 때 원형 집자리도 동시에 경사면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인근 증산리유적에서 원형 집자리만 확인된 점을 보면 장방형 집자리 소멸 이후에 원형 집자리만이 유행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도구의 제작
송국리유적은 경사면을 매립하여 활용공간을 정비하고, 대형 건물을 중심으로 하는 의례공간과 그리로 향하는 대규모 접근시설을 구축하는 등 다른 유적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이 있다. 이러한 취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과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송국리 취락의 권력자는 비파형동검과 청동끌銅鑿, 다수의 옥과 석기 등 위세품과 함께 묻힌 돌널무덤의 주인공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대롱옥과 석재 뚜르개. 폐기 구덩이와 주변에서 대롱옥이 여러 점과 대롱옥의 구멍을 뚫는데 사용하는 석제 뚜르개가 발견되어 송국리에서 대롱옥을 직접 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송국리의 수장은 당시 최고의 기술 제품인 청동기로 상징되는 선진문물을 독점할 만큼의 능력이 있었다. 그는 청동기의 소유에 그치지 않고 자체적인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청동도끼銅斧 거푸집鎔范이다. 이 거푸집은 송국리유적 내 비교적 높은 봉우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유구의 형태가 뚜렷하지 않지만 기둥구멍과 저장용 구덩이가 달린 유구에서 발견되었다. 본래 사용되던 곳에서 이탈하여 유입된 것이 아니라면 인근에 청동기 제작이 이루어지던 공방이 있었을 것이다. 주변부보다 높은 지점에 청동기 제작 공방이 있었다는 점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데, 이는 청동기 생산기술을 가진 자의 독보적인 위상을 대변한다.

비파형동검과 함께 부장된 위세품으로 주목되는 것이 대롱옥이다. 대롱옥은 원석의 확보도 쉽지 않거니와 제작과정에 상당한 공력이 드는 만큼 쉽게 가질 수 있는 장신구는 아니었다. 최근에는 도구 제작과 관련있는 폐기 구덩이에서 대롱옥이 여러 점 나왔는데, 주변에서 대롱옥의 구멍을 뚫는데 사용된 석제 뚜르개石製穿孔具가 발견되었다. 송국리 취락에서 대롱옥도 직접 제작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청동도끼 거푸집이 출토된 능선 아래의 경사면에서는 토기가마도 확인된 바 있다. 이렇듯 청동기・대롱옥・토기가마 등 도구 제작과 관련한 자료들이 근거리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다만 이 일대를 전문적인 생산 공간으로 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한편, 취락 내에서 석기 제작이 매우 활발하였던 것 같다. 전문적인 석기제작 공간이 있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집자리에서의 숫돌 출토량이 많다. 실제 숫돌의 출토 수는 전체 석기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식량의 생산과 저장
송국리유적의 경제적 기반은 농업을 통한 곡물생산이었다. 송국리유적에서 아직까지 논이나 밭과 같은 경작유구耕作遺構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집자리에서 다량의 탄화미와 조 등의 곡물이 출토되어 쌀과 조 농사가 병행된 것을 알 수 있다. 곡물의 이삭을 따는데 쓰는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이 전체 석기 중 약 20% 가량을 차지하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송국리문화에 속하는 보령 관창리유적과 논산 마전리유적에서 물을 가두는 보洑와 수로, 그리고 논이 발견된 바 있다. 앞으로 당시 최상위 취락이었던 송국리유적에서도 청동기시대 논이 발견될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송국리마을이 지역공동체에서 최상위에 위치하므로, 직접 곡물생산에 관여하지 않고 주변의 작은 마을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어서 송국리유적 주변 저지대의 조사를 통하여 그 실체를 밝힐 과제는 남아있다.

직접 식량생산활동을 하였든 주변으로부터 공급을 받았든, 지역공동체 속에서 생산물의 관리라는 차원에서 저장 역시 송국리취락의 주요 사회적 기능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앞에서 의례공간의 대형 건물터가 곡물의 저장고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청동기시대의 저장시설로 가장 확실한 것은 땅을 파서 만든 저장 구덩이貯藏穴이다.

지하에 마련한 저장 구덩이는 덩이뿌리나 덩이줄기는 물론 곡물의 보관에도 효과적이다. 뿐만 아니라 화재와 동물에 의한 피해에 취약한 지상 건물터의 약점을 보완하고 겨울나기와 은닉에도 유리하다. 지금까지 송국리유적에서 확인된 저장 구덩이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의례공간의 남쪽 사면에서 3기의 저장구덩이가 발견된 바 있다. 송국리유적의 일정 구역에 저장구덩이가 모여 있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왼쪽) 청동도끼 거푸집. 송국리에서 청동기를 자체 생산하였음을 보여준다.
(중앙) 송국리문화에 속하는 논산 마전리유적의 논 모습이다. 송국리유적에서도 논이 발견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른쪽) 의례공간 남쪽 사면에서 저장구덩이 3기가 발견되었다. 지하 저장고는 동물이나 외부인의 약탈에 덜 노출되고 월동에도 유리하였다.


송국리 마을의 구조와 변천

송국리유적에서는 경사면을 매립하여 대지를 확장하는 성토공사의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 공사를 시행한 사람들은 방형 집자리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력한 수장의 지휘 아래 계획적으로 취락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조사 성과를 종합하면 송국리 취락은 주거, 의례, 매장 등 주요 시설을 의도적으로 취락의 특정 구역에 배치하는 등 계획 하에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취락 전체를 아우르는 목책을 설치한 것도 이 시점의 일로 추정되어왔다. 하지만 종래 목책으로 이해해온 기둥 구덩이들은 의례공간 건물터의 일부로 확인되었고, 100m 이상 평행하며 배치상태가 일치하는 두 기둥열은 의례공간 또는 무덤공간으로 향하는 일종의 연결시설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설은 취락을 구획하는 기능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중심으로 목책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지상건물터를 배치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의례를 중심으로 취락을 재편한 듯하다. 청동 도끼 거푸집의 출토지, 토기 가마터, 대롱옥과 생산도구의 출토지가 거리나 지형상 관련성이 큰 점으로 볼 때 도구의 생산을 위한 별도 공간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식량 저장구덩이를 집중적으로 배치한 구역이 확인될 여지도 남아 있다.

송국리 취락의 방형・장방형 집자리는 구릉 상부의 평탄한 대지면에 조성된 반면, 전형적인 송국리식 집자리인 원형 집자리는 남사면에 모여 있다. 취락의 대지조성을 위한 대규모 매립 및 정지 공사, 대형 건물터와 의례공간의 조성, 비파형동검의 제작과 껴묻기 등은 방형 집자리가 중심을 이룬 시기의 사건으로 생각된다.

한편, 전형적인 송국리식 집자리인 원형 집자리가 주류를 이루는 시기에 이르면, 주거 공간이 사면으로 이동하는 등 송국리의 토지 이용방식이 현저히 변화한다. 그간 구릉 상부의 평탄대지에 조영된 장방형 집자리는 사면의 원형 집자리와 공존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밭으로 경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침식이 심한 구릉의 특성상 경작층이 삭평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존에 송국리유적의 변천을 이해하는 틀은 방어시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조사 결과 목책과 환호로 이해되어온 유구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그 성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구되고 있다. 그 성격과 기능에 대해서는 이 주변부의 추가적인 조사를 통하여 밝혀지게 될 것이다.

청동기시대 주거, 의례・저장・생산・무덤(매장) 등 여러 기능을 수행한 공간으로 구성된 대규모 취락이 등장한 것은 송국리문화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수전 농경을 생계기반으로 삼아 정주생활定住生活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취락의 전형적인 모습은 취락지 전체가 발굴조사된 보령 관창리유적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상위 권력을 가진 수장의 주도하에 토목공사를 벌여 취락의 터를 닦고 그 위에 대형 건물을 중심으로 한 의례공간을 마련하고, 대지를 관통하여 연결통로를 건설한 취락 구조는 송국리유적의 독특한 면모이다.

이러한 취락의 조성을 주도한 수장은 유적에서 가장 조망 좋은 자리에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검과 함께 묻혔다. 송국리유적 인근의 산직리 고인돌도 이러한 기획의 산물이 아닐까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고인돌이 초대형인 점뿐 아니라 그 위치가 송국리 취락이 자리잡은 구릉의 최말단부로서, 가시성과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모한 추정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청동기시대 중・후기의 최상위 취락으로서의 송국리유적의 실체는, 일본의 요시노가리유적에서 보듯이 수장과 공동체 구성원의 주거공간, 수장과 의례공간, 생산물의 저장공간, 매장공간, 목책 환호 등 구획 및 방어시설이 기획 조성된 모습으로 밝혀질 것이다.

송국리마을의 주요 시설 분포. 송국리 마을은 주거·의례·매장 등 주요 시설을 계획하에 배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한 목책을 설치하고, 일부는 의례공간의 건물터로 조성하였다. 청동도끼 거푸집의 출토지, 토기 가마터, 대롱옥과 생산도구의 출토지로 볼 때 도구의 생산을 위한 공간도 별도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송국리유적 조사 40년, 기대와 전망

대지조성을 위한 성토 공사, 의례 공간과 주랑柱廊 형태의 대규모 접근시설 등은 청동기시대 다른 유적에서는 볼 수 없는 송국리유적의 독특한 특징이다. 막대한 노동력을 동원하여 이러한 시설물을 조성한 배경이 무엇일까? 혹시, 당시 취락 간의 관계망 속에서 송국리유적은 훨씬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예컨대 수도와 같은 취락이었을까? 그렇다면 청동기시대 사회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조직화된 계층 속에서 광역의 네트워크가 구축된 대규모 지역공동체의 형태를 가진 복합사회였을까? 이는 앞으로의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세부적인 취락의 구성요소에 대한 연구나 취락 주변의 경작지에 대한 검증 등도 반드시 밝혀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송국리유적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까지 송국리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도 총 14차에 걸쳐 시행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단기간에 걸쳐 협소한 면적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기에 송국리유적의 진면모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뿐더러 새로운 해석의 여지도 제한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행히 최근 조사가 재개되어 기존의 조사 성과를 보완하고 새로운 정보를 확보하면서 취락의 다양한 면모도 밝혀지고 있다.

이제 선입견을 버리고 차분하게 송국리유적의 면모를 파악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송국리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현대인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는 화석化石과 같은 유적이다. 송국리유적의 실체가 드러나면, 우리의 청동기시대에 대한 이해 수준은 괄목할만한 도약을 보일 것이다. 송국리취락으로의 접근에 긴 호흡과 깊은 안목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송국리형 집자리를 둘러보고 있는 연구자들. 송국리 유적 조사가 시작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정치영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


http://www.nrich.go.kr/kr/Journal/2011_kor/top10_index.jsp?page=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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