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28, 2016

송국리 문화

삶과 죽음의 공간이 공존한 청동기시대의 마을 구조

대지조성을 위한 성토 공사, 의례 공간과 주랑柱廊 형태의 대규모 접근시설 등은 청동기시대 다른 유적에서는 볼 수 없는 송국리유적의 대표적인 특징이며, 그 규모와 취락 구조적인 면에서는 독보적인 유적이다.


송국리유적과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영위함으로써 개인 노동력의 한계를 극복해 왔다. 공동생활은 야생 식물의 채집이나 사냥은 물론, 작물의 재배와 동물의 사육 등 식량을 확보하고 생산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효과를 드러냈다. 한반도의 인류는 신석기시대부터는 땅을 파고 집을 짓고 한데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청동기시대의 마을유적은 전국 각지에서 그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특히 부여 송국리유적은 그 규모와 구조적인 면에서는 독보적인 마을유적이다.

청동기시대 중 일정기간 한반도 중남부 전역에 걸쳐 성행한 농경문화를 ‘송국리문화松菊里文化’라 일컬을 뿐만 아니라, 송국리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집자리住居址나 토기에 ‘송국리형松菊里形’ 또는 ‘송국리식松菊里式’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누구나 한번 쯤 송국리유적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뿐 아니라 한국의 선사문화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유적이다. 그만큼 송국리유적의 상징성은 매우 강하다.

송국리유적, 어떤 곳인가?

많은 발견이 그러하듯, 송국리유적도 우연한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그 상황은 매우 극적이었다. 1974년 지역 주민의 제보에 의해 발굴조사된 돌널무덤石棺墓에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돌칼石刀, 돌화살촉石鏃, 대롱옥管玉 등의 껴묻거리副葬品가 나왔다. 이 중 비파형동검은 금강유역이 한반도 중・남부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임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되었다.

송국리유적에 이목을 집중시킨 돌널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ㆍ대롱옥 등의 껴묻거리가 확인되어, 목책으로 둘러싸인 대규모 마을을 세울 만큼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수장의 무덤으로 주목되었다.


1975년 농지확대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송국리유적이 자리잡은 구릉 약 450,000㎡가 개간 대상지역에 포함됨으로써 3년에 걸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당시, 모양이 원형이고 중앙에 돼지코처럼 두개의 기둥 구멍이 있는 집자리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알려짐으로써 ‘송국리형 집자리’로 불리게되었다. 이 외에 방형의 집자리도 확인되었는데, 여기서는 불에 탄 볍씨가 많이 나와 송국리 사람들이 쌀농사를 지었음을 알려 주었다. 1980년대에는 좁은 면적에 밀집해 있는 집자리들이 많이 확인되었다.

송국리유적을 청동기시대 ‘대규모 마을’로 보는 인식은 1990년대 초반부터 전개되었다. 집자리들이 자리 잡은 구릉의 가장자리를 따라 열을 이루고 있는 일련의 큰 구덩이柱穴들이 발견되었는데, 확인된 것만 450m에 이른다. 이 구덩이 열은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통나무 울타리 즉 목책木柵의 기둥을 세웠던 구덩이로 알려졌다. 목책에는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는 물론 외부에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수십 개의 통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비스듬히 박아둔 녹채鹿砦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송국리유적은 견고한 방어시설을 갖춘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마을, 즉 방어취락防禦聚落이었던 것이다. 사실 방어취락은 이 조사가 시행되기 직전 울산 검단리유적에서 수십 기의 집자리가 거대한 도랑還濠에 둘러싸인 모습의 마을유적이 발견되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었다.

송국리유적에서는 경사면에 흙을 밀어 넣는 성토작업을 통하여 구릉 위의 활용공간을 넓히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진 점도 밝혀졌다. 이렇게 조성된 대지에 집을 짓고 목책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공사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므로 매우 강한 지도력을 갖춘 수장首長이 송국리에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바로 비파형동검과 함께 묻힌 돌널무덤의 주인공이 유력한 후보로 지목된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기원전 10~5세기경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야요이문화彌生文化가 형성되었는데, 집자리는 물론 토기ㆍ마제석기・각종 건축물・환호・논 그리고 무덤에 이르기까지 송국리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 밝혀지게 되었다. 송국리유적은 그 기원지로서 국제적인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청동기시대 주거 변천과 부여 송국리유적 집자리의 의미

송국리문화 이전의 청동기시대 집자리
한반도의 청동기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뚜렷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남한의 경우만 본다면 대략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600~300년경까지 약 1,000년 이상 지속된 것으로 본다. 이 기간 동안 대륙에서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기도 하고 한반도 내에서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구조와 도구도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송국리문화가 시작된 연대는 아직 분명치 않으나, 전국 발굴현장에서 채취한 시료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치를 취합한 결과 대략 기원전 900년경에 시작되어 발전을 이루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원전 700년경 이후에는 송국리유적을 중심으로 가장 발달된 모습을 보이며, 각 지역마다 긴 시간동안 마을이 유지되면서 지역적 색채도 가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안 불당동유적(왼쪽)과 연기 송원리유적(오른쪽)의 세장방형 집자리. 송국리문화 이전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역삼동유형(왼쪽)과 가락동유형(오른쪽) 집자리가 두 축을 이루었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로 가장 오래된 것은 방형方形 집자리 내에 돌로 바닥과 주위를 둘러 만든 화덕자리爐址를 갖춘 집자리인데, 하남 미사리유적에서 처음 알려졌다. 송국리문화 이전의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긴 장방형長方形의 집자리가 유행하였다. 벽을 따라 기둥을 세웠고 집자리 중심축 선에 한개 또는 다수의 화덕자리가 있으며 저장용 구덩이가 설치된 것이 많다.

기둥을 설치하는 방법이나 내부에 갖추어진 시설의 구조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발견된 유적의 이름을 따서 가락동유형(둔산형), 역삼동유형(관산리형) 등으로 불린다. 가락동유형 집자리는 벽을 따라 세운 기둥의 받침으로 네모난 돌을 사용하였고, 화덕자리도 돌을 돌려 세워 네모모양으로 만들었다. 겹아가리에 빗금무늬二重口緣短斜線文를 새긴 토기가 많이 나온다. 이에 비해 역삼동유형 집자리는 구덩이를 파고서 기둥을 세웠으며 화덕자리는 맨바닥을 그냥 쓰거나 얕은 구덩이를 파서 만들었다.

구멍무늬토기孔列文土器나 톱니입술토기口脣刻目土器, 붉은 간토기赤色磨硏土器가 주로 출토된다. 그러나 석기는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집자리는 화덕자리를 중심으로 방을 나누어 가장家長과 자식들 세대가 공동으로 거주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족 구성원의 증가에 따라 집을 증축한 예도 발견된다.

송국리문화의 집자리
청동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로 분류되는 송국리문화의 집자리는 전기에 비하여 현저하게 작아진다. 이는 여러 가구가 한 집에 공동으로 거주하는 방식으로부터 소형집자리에 세대가 분가하여 거주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상은 경기 남부 이남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되는 송국리문화의 분포권뿐 아니라, 집자리의 구조와 유물의 구성이 다른 강원 영서와 영동・동남해안 지역 등 남한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청동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로 분류되는 송국리문화의 집자리는 한 세대가 거주할 정도로 소형화된다. 송국리형 집자리는 중심부에 타원형 구덩이와 두 개의 기둥구멍이 있는 점이 특징인데, 평면형태가 방형인 것과 원형인 것이 있다. 전자를 휴암리식, 후자를 송국리식이라 부른다. (사진은 서산 송국리 14호 휴양리식 집자리(왼쪽) 송국리 68호 송국리식 집자리(오른쪽))


송국리형 집자리란 중심부에 타원형 구덩이와 두 개의 기둥구멍이 있는 구조를 일컫는데, 집자리의 형태가 원형인 송국리식과 방형인 휴암리식으로 구분된다. 중앙부의 타원형 구덩이를 화덕자리로 보는 의견도 있지만, 화덕자리가 확연히 눈에 띄지 않는 점은 송국리형 집자리의 큰 특징이다. 송국리형 집자리의 등장 과정과 기원지를 밝히는 문제는 청동기시대 연구자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지만, 전기의 역삼동유형 집자리가 점차 변화하여 소형화된 것으로 보는 의견과 그와 관계없이 등장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맞선다.

역삼동유형 집자리가 변화된 것으로 보는 의견에서는 방형의 휴암리식 집자리가 먼저 등장하고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가 뒤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집자리에서 나온 토기를 비교한 결과, 휴암리식(방형) 집자리에서 나온 토기들이 송국리식(원형) 집자리 출토품에 비해 먼저 제작된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송국리유적에서 발굴된 집자리는 원형과 (장)방형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원형은 이름 그대로 송국리식이다. 방형 집자리는 바닥을 오목하게 파고 만든 둥근 화덕자리를 갖추고 있고 벽을 따라 기둥을 세운 흔적도 확인된다.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와 두개의 기둥 구멍이 없어 휴암리식이라 불리는 송국리형 집자리와는 다른 형태이다. 특히 장방형 집자리 중에는 길이가 14m에 이르는 대형급도 있다. 집자리들이 겹쳐 있는 상태가 확인된 예는 많지 않으나,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가 장방형 집자리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예가 있다. 또 방형 집자리를 파괴한 후 장방형 집자리가 축조된 경우도 확인되므로, 송국리유적에서 집자리가 만들어진 순서는 대체로 방형→장방형→원형으로 파악되고 있다.

집자리의 모양에 따라 위치와 배치 방법에 차이를 보인다. 방형과 장방형 집자리들은 주로 구릉 상부의 평탄한 대지에 자리를 잡은 반면 원형 집자리들은 경사면에 모여 있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큰 것과 작은 것 2기가 짝을 이루고 있다.

송국리유적 28호(왼쪽), 23호 집자리. 송국리유적에서는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 외에 방형과 장방형 집자리도 많이 확인된다. 이들은 중심부에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구멍이 없고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화덕자리가 있어, 송국리형(휴암리식) 집자리와는 다른 구조이다. 장방형 집자리 중에는 길이가 14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러한 배치 상황을 보면, 방형・장방형 집자리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원형 집자리에 살았던 사람들의 토지 이용방식이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송국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일까, 아니면 대지 이용방식을 수정해야 할 어떤 사회적 필요성이 생긴 것일까?

청동기시대 송국리 마을의 이모저모

방어시설
송국리유적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마을 전체가 목책木柵, 즉 통나무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점이었다. 일본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유적에서는 마을 주위를 감싼 거대한 도랑環濠이 알려져 있는데, 이 도랑의 가장 큰 기능은 마을의 내부를 구획하거나 방어를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울산 검단리ㆍ창원 남산유적 등이 그 기원에 해당한다. 그런데, 도랑이 아닌 목책을 세워 마을을 방어한 유적은 송국리가 유일하였다. 특히 목책은 서쪽으로 돌출된 가지능선에서 시작되어 유적이 분포하는 구릉과 곡간부를 아우르는 대규모 시설로서, 내부 면적이 작게는 300,000㎡, 크게는 610,000㎡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 목책은 방형 집자리와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 목책을 파괴하고 만들어진 도랑溝의 일부도 확인되는데, 원형 집자리가 군집을 이룬 마을을 둘러싼 시설로 알려졌다. 이로써 송국리유적은 방형 집자리가 중심을 이룬 마을일 때는 목책, 원형 집자리가 중심이었을 때는 도랑環濠으로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이 가설은 송국리유적의 변화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의 근간을 이루었다.

의례공간, 묘역, 주거구역의 구획
그런데 목책 주변을 확대 발굴한 결과, 목책이 지나가는 대지의 유적분포 양상이 밝혀지면서 송국리유적의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본래 한 줄이라 알려져 온 1열의 목책 기둥 구멍과 나란한 기둥 구멍열이 하나 더 확인되면서 목책이 아닌 대형 건물터로 판명된 것이다. 길이 22~24m의 12칸 규모의 대형 건물은 견고한 통나무 담장인 울책鬱柵으로 둘러싸여 있고, 건물과 담장 사이에는 넓은 마당을 두었다. 담장에서는 폭 1m 내외의 좁은 출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시설은 대지의 남・북에 각각 1기씩 있었는데, 북쪽의 것이 먼저 사용되다 폐기된 다음 남쪽에 고쳐 만든 것이다. 대지의 남쪽 혹은 북쪽에 건물이 있을 때 다른 한 쪽은 넓은 광장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은 또 하나의 통나무 담장으로 외부 공간과 구분되었다. 이 시설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비좁은 출입구를 통과해야만 했다. 이로써 견고한 담장으로 대형 건물과 마당前庭 및 광장廣場을 둘러친 일종의 ‘특수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송국리유적의 의례공간. 돌출된 능선의 대지 남쪽과 북쪽에 있는 대형 지상 건물터 2기. 건물앞에는 마당이 있고 주위를 견고한 통나무 담장으로 감쌌다. 농경 의례공간 혹은 곡물의 창고로 추정된다. 이 시설의 동쪽 높은 지대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증축한 지상건물터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수공간’의 기능은 무엇일까? 단서는 유적 내 이 시설의 위치와 다른 유구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송국리유적에는 집자리들의 분포 밀도가 매우 높지만 이 시설 내부에는 집자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 2기가 확인되긴 했지만 이 시설이 폐기된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시설은 일반 집자리들이 모여 있는 대지와는 구별된 특수 공간인 셈이다. 둘째, 이 공간의 남쪽 능선 정상부에는 비파형동검이 부장된 돌널무덤를 비롯하여 널무덤, 독무덤 등이 조성되어 있다. 송국리 취락의 최고위 인물, 즉 수장首長과 그 일족의 무덤 공간이다. 이와 같이 주거 공간과 무덤 공간이 구분된 취락 내에서 이러한 특수 공간의 성격을 추정해 볼 때, 가장 유력한 것은 제의를 거행했던 공간으로 보는 것이다. 담장과 좁은 출입구를 통하여 대형 건물과 마당 및 광장에 들어갈 수 있는 지위(계급)와 인원은 극도로 통제되었을 것이다. 송국리 취락의 경제적 기반이 농경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공간에서 거행된 의례의 1순위는 농경의례였을 것이다.

이 건물은 활동공간이 지상에 있거나 정자처럼 마루를 높게 띄운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후자의 경우 통풍을 필요로 하는 곡물 저장에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종자의 보존이 매우 중요했던 만큼 이 건물과 같이 통제된 공간에 보관하고 특별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 건물의 담장 안쪽에는 망루를 세워 감시를 위해 보초가 적절하게 배치되었을 것이다. 이 대형 건물은 제사장이 의례를 집전하는 중심 건물이지만, 농경으로 수확한 곡물의 저장고 역할도 겸하였을 것이다.

구릉 위의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는 방형과 장방형 집자리들이 즐비하다. 원형 집자리 대부분이 구릉의 사면부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점과 대비된다. 앞서 살핀 의례공간 내에 (장)방형 집자리가 없는 점에 비추어 보면 평탄한 대지 상부는 주로 주거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건물을 감싼 울책. 울책에는 폭 1m 내외의 좁은 출입구를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으며, 울책 안쪽에는 감시를 위해 망루를 세웠다.
길고 긴 주랑柱廊의 정체
이 대지의 서쪽 언저리에도 목책이 일렬로 설치되어 북쪽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목책과 주변 시설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하여 기존에 발굴한 부분을 넓게 발굴하니 한 열이 아니라 두 열의 기둥 구덩이열柱穴列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기둥열은 완벽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기둥자리의 배치 간격도 일치한다. 게다가 구덩이 바닥에 큰 돌이 박혀 있는 것이 적지 않았는데, 돌의 윗부분을 쪼아 오목하게 만든 것도 있다. 기둥의 받침돌礎盤石이 분명하다. 이 구조물은 완전하게 확인된 것만 98m이고, 기존에 목책으로 알려진 길이를 합하면 227m가 된다. 다소 불확실한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100m가 넘는 이 구조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두 줄의 기둥열은 하나의 구조물임에 틀림없으며, 받침돌이 있는 점으로 보아 지붕을 갖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간에 단절된 부분이 보이지 않으므로 주랑柱廊과 같이 긴 건축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설이 남서쪽으로 연장될 경우 앞서 살핀 의례공간 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대지 언저리에 있는 지상건물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유적의 북동쪽 모처에서 의례공간 쪽으로 이어지는 연결통로의 기능을 가진 구조물일 가능성이 높다. 일종의 접근시설인 셈이니 의례공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종래 취락을 감싸는 목책으로 알려져 온 목주열은 두 열이 짝을 이룬 구조로 밝혀졌다. 확인된 길이만 98m이며 기존에 조사된 길이를 합하면 총 연장 227m에 이른다. 의례공간으로 연결되는 주랑이 아닐까?

목주시설의 배치 상태. 일부 구간에서는 보다 먼저 사용된 목주시설이나 집자리와 겹쳐있다.


주거공간의 변화
한편, 대지의 집자리들은 이 구조물과의 선후관계에 따라 시기가 나뉜다. 이 목주시설은 대지의 언저리를 따라 설치되었는데 이 부분은 경사면을 매립하여 확장된 것이다. 이 매립토 내에 화재 폐기물을 비롯한 유물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성토 공사 이전에도 집자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시설과 동시에 존속했던 집자리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도랑을 파고 통나무 담장을 세워 구획한 공간에는 지상건물도 구축되었다. 이후 이러한 시설이 폐기된 다음에도 다시 집자리가 들어섰다. 특히 목주시설 이전 혹은 같은 시기의 집자리는 방형이거나 규모가 작은 장방형이며, 그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집자리는 규모가 비교적 큰 장방형 집자리들이다.

방형·장방형 집자리와 원형 집자리가 겹쳐진 모습. 송국리유적에서 원형인 ‘송국리형 집자리’는 방형과 장방형 집자리 보다 늦게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형 집자리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한 원형 집자리는 대부분 경사면에 지어졌는데, 이러한 취락은 도랑 즉 환호環濠로 둘러싸인 방어취락일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현재까지 환호의 존재는 다소 불확실하다. 집자리 외의 넓은 토지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는 미지수이다. 이와 같이, 송국리유적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변화를 겪으며 존속해 왔다. 하지만 중심 시기는 특수 시설로 구성된 ‘의례 공간’이 만들어진 시기로, 100m가 넘는 목주시설도 이때 만들어졌다. 최고 수장급 인물과 그 가족의 무덤공간도 전망 좋은 곳에 조성하였으며, 이런 주요 시설과 겹치지 않는 대지가 주거구역이었을 것이다.

한편, 원형 집자리는 시기적으로 방형이나 장방형 집자리보다 늦게 등장하여 송국리유적의 주류적인 집자리가 되었다. 목주시설이 폐기된 이후 장방형 집자리들이 대지 평탄면에 들어섰을 때 원형 집자리도 동시에 경사면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인근 증산리유적에서 원형 집자리만 확인된 점을 보면 장방형 집자리 소멸 이후에 원형 집자리만이 유행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도구의 제작
송국리유적은 경사면을 매립하여 활용공간을 정비하고, 대형 건물을 중심으로 하는 의례공간과 그리로 향하는 대규모 접근시설을 구축하는 등 다른 유적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이 있다. 이러한 취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과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송국리 취락의 권력자는 비파형동검과 청동끌銅鑿, 다수의 옥과 석기 등 위세품과 함께 묻힌 돌널무덤의 주인공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대롱옥과 석재 뚜르개. 폐기 구덩이와 주변에서 대롱옥이 여러 점과 대롱옥의 구멍을 뚫는데 사용하는 석제 뚜르개가 발견되어 송국리에서 대롱옥을 직접 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송국리의 수장은 당시 최고의 기술 제품인 청동기로 상징되는 선진문물을 독점할 만큼의 능력이 있었다. 그는 청동기의 소유에 그치지 않고 자체적인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청동도끼銅斧 거푸집鎔范이다. 이 거푸집은 송국리유적 내 비교적 높은 봉우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유구의 형태가 뚜렷하지 않지만 기둥구멍과 저장용 구덩이가 달린 유구에서 발견되었다. 본래 사용되던 곳에서 이탈하여 유입된 것이 아니라면 인근에 청동기 제작이 이루어지던 공방이 있었을 것이다. 주변부보다 높은 지점에 청동기 제작 공방이 있었다는 점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데, 이는 청동기 생산기술을 가진 자의 독보적인 위상을 대변한다.

비파형동검과 함께 부장된 위세품으로 주목되는 것이 대롱옥이다. 대롱옥은 원석의 확보도 쉽지 않거니와 제작과정에 상당한 공력이 드는 만큼 쉽게 가질 수 있는 장신구는 아니었다. 최근에는 도구 제작과 관련있는 폐기 구덩이에서 대롱옥이 여러 점 나왔는데, 주변에서 대롱옥의 구멍을 뚫는데 사용된 석제 뚜르개石製穿孔具가 발견되었다. 송국리 취락에서 대롱옥도 직접 제작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청동도끼 거푸집이 출토된 능선 아래의 경사면에서는 토기가마도 확인된 바 있다. 이렇듯 청동기・대롱옥・토기가마 등 도구 제작과 관련한 자료들이 근거리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다만 이 일대를 전문적인 생산 공간으로 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한편, 취락 내에서 석기 제작이 매우 활발하였던 것 같다. 전문적인 석기제작 공간이 있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집자리에서의 숫돌 출토량이 많다. 실제 숫돌의 출토 수는 전체 석기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식량의 생산과 저장
송국리유적의 경제적 기반은 농업을 통한 곡물생산이었다. 송국리유적에서 아직까지 논이나 밭과 같은 경작유구耕作遺構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집자리에서 다량의 탄화미와 조 등의 곡물이 출토되어 쌀과 조 농사가 병행된 것을 알 수 있다. 곡물의 이삭을 따는데 쓰는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이 전체 석기 중 약 20% 가량을 차지하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송국리문화에 속하는 보령 관창리유적과 논산 마전리유적에서 물을 가두는 보洑와 수로, 그리고 논이 발견된 바 있다. 앞으로 당시 최상위 취락이었던 송국리유적에서도 청동기시대 논이 발견될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송국리마을이 지역공동체에서 최상위에 위치하므로, 직접 곡물생산에 관여하지 않고 주변의 작은 마을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어서 송국리유적 주변 저지대의 조사를 통하여 그 실체를 밝힐 과제는 남아있다.

직접 식량생산활동을 하였든 주변으로부터 공급을 받았든, 지역공동체 속에서 생산물의 관리라는 차원에서 저장 역시 송국리취락의 주요 사회적 기능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앞에서 의례공간의 대형 건물터가 곡물의 저장고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청동기시대의 저장시설로 가장 확실한 것은 땅을 파서 만든 저장 구덩이貯藏穴이다.

지하에 마련한 저장 구덩이는 덩이뿌리나 덩이줄기는 물론 곡물의 보관에도 효과적이다. 뿐만 아니라 화재와 동물에 의한 피해에 취약한 지상 건물터의 약점을 보완하고 겨울나기와 은닉에도 유리하다. 지금까지 송국리유적에서 확인된 저장 구덩이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의례공간의 남쪽 사면에서 3기의 저장구덩이가 발견된 바 있다. 송국리유적의 일정 구역에 저장구덩이가 모여 있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왼쪽) 청동도끼 거푸집. 송국리에서 청동기를 자체 생산하였음을 보여준다.
(중앙) 송국리문화에 속하는 논산 마전리유적의 논 모습이다. 송국리유적에서도 논이 발견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른쪽) 의례공간 남쪽 사면에서 저장구덩이 3기가 발견되었다. 지하 저장고는 동물이나 외부인의 약탈에 덜 노출되고 월동에도 유리하였다.


송국리 마을의 구조와 변천

송국리유적에서는 경사면을 매립하여 대지를 확장하는 성토공사의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 공사를 시행한 사람들은 방형 집자리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력한 수장의 지휘 아래 계획적으로 취락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조사 성과를 종합하면 송국리 취락은 주거, 의례, 매장 등 주요 시설을 의도적으로 취락의 특정 구역에 배치하는 등 계획 하에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취락 전체를 아우르는 목책을 설치한 것도 이 시점의 일로 추정되어왔다. 하지만 종래 목책으로 이해해온 기둥 구덩이들은 의례공간 건물터의 일부로 확인되었고, 100m 이상 평행하며 배치상태가 일치하는 두 기둥열은 의례공간 또는 무덤공간으로 향하는 일종의 연결시설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설은 취락을 구획하는 기능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중심으로 목책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지상건물터를 배치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의례를 중심으로 취락을 재편한 듯하다. 청동 도끼 거푸집의 출토지, 토기 가마터, 대롱옥과 생산도구의 출토지가 거리나 지형상 관련성이 큰 점으로 볼 때 도구의 생산을 위한 별도 공간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식량 저장구덩이를 집중적으로 배치한 구역이 확인될 여지도 남아 있다.

송국리 취락의 방형・장방형 집자리는 구릉 상부의 평탄한 대지면에 조성된 반면, 전형적인 송국리식 집자리인 원형 집자리는 남사면에 모여 있다. 취락의 대지조성을 위한 대규모 매립 및 정지 공사, 대형 건물터와 의례공간의 조성, 비파형동검의 제작과 껴묻기 등은 방형 집자리가 중심을 이룬 시기의 사건으로 생각된다.

한편, 전형적인 송국리식 집자리인 원형 집자리가 주류를 이루는 시기에 이르면, 주거 공간이 사면으로 이동하는 등 송국리의 토지 이용방식이 현저히 변화한다. 그간 구릉 상부의 평탄대지에 조영된 장방형 집자리는 사면의 원형 집자리와 공존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밭으로 경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침식이 심한 구릉의 특성상 경작층이 삭평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존에 송국리유적의 변천을 이해하는 틀은 방어시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조사 결과 목책과 환호로 이해되어온 유구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그 성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구되고 있다. 그 성격과 기능에 대해서는 이 주변부의 추가적인 조사를 통하여 밝혀지게 될 것이다.

청동기시대 주거, 의례・저장・생산・무덤(매장) 등 여러 기능을 수행한 공간으로 구성된 대규모 취락이 등장한 것은 송국리문화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수전 농경을 생계기반으로 삼아 정주생활定住生活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취락의 전형적인 모습은 취락지 전체가 발굴조사된 보령 관창리유적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상위 권력을 가진 수장의 주도하에 토목공사를 벌여 취락의 터를 닦고 그 위에 대형 건물을 중심으로 한 의례공간을 마련하고, 대지를 관통하여 연결통로를 건설한 취락 구조는 송국리유적의 독특한 면모이다.

이러한 취락의 조성을 주도한 수장은 유적에서 가장 조망 좋은 자리에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검과 함께 묻혔다. 송국리유적 인근의 산직리 고인돌도 이러한 기획의 산물이 아닐까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고인돌이 초대형인 점뿐 아니라 그 위치가 송국리 취락이 자리잡은 구릉의 최말단부로서, 가시성과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모한 추정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청동기시대 중・후기의 최상위 취락으로서의 송국리유적의 실체는, 일본의 요시노가리유적에서 보듯이 수장과 공동체 구성원의 주거공간, 수장과 의례공간, 생산물의 저장공간, 매장공간, 목책 환호 등 구획 및 방어시설이 기획 조성된 모습으로 밝혀질 것이다.

송국리마을의 주요 시설 분포. 송국리 마을은 주거·의례·매장 등 주요 시설을 계획하에 배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한 목책을 설치하고, 일부는 의례공간의 건물터로 조성하였다. 청동도끼 거푸집의 출토지, 토기 가마터, 대롱옥과 생산도구의 출토지로 볼 때 도구의 생산을 위한 공간도 별도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송국리유적 조사 40년, 기대와 전망

대지조성을 위한 성토 공사, 의례 공간과 주랑柱廊 형태의 대규모 접근시설 등은 청동기시대 다른 유적에서는 볼 수 없는 송국리유적의 독특한 특징이다. 막대한 노동력을 동원하여 이러한 시설물을 조성한 배경이 무엇일까? 혹시, 당시 취락 간의 관계망 속에서 송국리유적은 훨씬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예컨대 수도와 같은 취락이었을까? 그렇다면 청동기시대 사회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조직화된 계층 속에서 광역의 네트워크가 구축된 대규모 지역공동체의 형태를 가진 복합사회였을까? 이는 앞으로의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세부적인 취락의 구성요소에 대한 연구나 취락 주변의 경작지에 대한 검증 등도 반드시 밝혀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송국리유적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까지 송국리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도 총 14차에 걸쳐 시행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단기간에 걸쳐 협소한 면적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기에 송국리유적의 진면모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뿐더러 새로운 해석의 여지도 제한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행히 최근 조사가 재개되어 기존의 조사 성과를 보완하고 새로운 정보를 확보하면서 취락의 다양한 면모도 밝혀지고 있다.

이제 선입견을 버리고 차분하게 송국리유적의 면모를 파악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송국리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현대인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는 화석化石과 같은 유적이다. 송국리유적의 실체가 드러나면, 우리의 청동기시대에 대한 이해 수준은 괄목할만한 도약을 보일 것이다. 송국리취락으로의 접근에 긴 호흡과 깊은 안목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송국리형 집자리를 둘러보고 있는 연구자들. 송국리 유적 조사가 시작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정치영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


http://www.nrich.go.kr/kr/Journal/2011_kor/top10_index.jsp?page=038

야요이초기유적의 송국리형 유적

야요이시대 - 주거

도래인이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의문은 "도래인이 어떤 생활을 했으며 그런 생활을 영위한 곳은 어디에 있나" 라고 하는 지극히 당연한 답으로 부터 풀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일본인 학자들은 대륙을 거쳐 한반도를 지나 북큐슈에 도달했다라고 주장한다.
인류의 발원지가 아프리카 이므로 아프리카를 포함시키면 아무나 받아 들이기 쉽지만 이들이 대륙이라는 글자를 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到来人がどこから来ただろうか? する疑問は "到来人がどんな生活をしたしそんな生活を営んだ所はどこにあるか" と言う極めて当たり答から解け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多くの日本人学者たちは大陸を経って朝鮮半島を通って北九州に到逹したと主張する.
人類の発源地がアフリカであるのでアフリカを含ませれば極めて常識的に誰でも受け入れやすいがこれらが大陸という字を抜くことができない理由は何だろう?

중국으로 부터 직접 도래를 주장하고 싶다면 당시 중국의 주거 형식이 일본에서 출토되는 것을 소개하면 좋겠지만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래인의 의식주 중에서 파악 가능한 주거의 형태가 도래인의 성격을 대변할 것이다.
고대 한국으로 부터 많은 도래인이 일본으로 건너 갔겠지만 특정지역의 주거 형식이 일본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http://blog.naver.com/marich77/40189440389
야요이시대-환호에서 중국형 환호라는 곳에서 중국형 주거형식이 나올까? 아니면 한국형 주거형식이 출토될까?
彌生時代-環濠で中国型環濠という所で中国型住居形式が出ようか? それとも韓国型住居形式が出土されるか?

오늘은 일본에 널리 분포된 송국리형 주거에 대해서 알아보자.
中国にから直接到来を主張したければ当時中国の住居形式が日本で出土されることを紹介すれば良いがそうなのが存在しなかったら到来人の衣食住の中で把握可能な住居の形態が到来人の性格を代弁するでしょう.
古代韓国から多い到来人が日本に渡ったが特定地域の住居形式が日本で広く発見されている.
今日は日本に広く分布された宋国利型住居に対して調べよう.


大地に刻まれた交流史 ~弥生時代の竪穴住居~     東憲章 ( 宮崎県教育庁文化財課 )
http://www.miten.jp/miten/modules/popnupblog/index.php?param=8-201004
こうした弥生時代の九州において、非常に特徴的な二つの竪穴住居が存在する。
 「松菊里(ショウキクリ)型住居」と「花弁状間仕切り住居」である。前者は、円形の平面プランで、床面中央部に土坑と2基の柱穴を持つことが特徴である。韓国の青銅器時代、初期稲作関連の遺跡として有名な「松菊里(ソングンニ)遺跡」で多く発見され、命名された。この松菊里型住居は、佐賀県や福岡県など玄界灘沿岸の北部九州地域を中心に、弥生時代前期の初期稲作関連遺跡で発見されている。このことは、我が国の初期稲作は、大陸から朝鮮半島経由で伝播したことの傍証となっている。そして、この松菊里型住居は、高鍋町持田中尾遺跡や都城市肱穴遺跡など、本県でも発見されている。
 後者は、弥生時代後期の南九州に分布する特徴的な竪穴住居である。平面形が円形や方形に掘り込まれた竪穴住居の壁の一部が内側に向かって張り出し、住居内の空間を仕切っている。その全体平面形が、花が開いたように見えることから「花弁状間仕切り住居」と呼ばれている。床面の中央に土坑や2基の柱穴を持つものも見られることから、「松菊里型住居」が変容したものとする意見も見られる。
 従来、南九州のみに見られる局地的な住居形態と考えられてきたが、近年、熊本県・佐賀県・大分県などの中部・北部九州地域での発見が相次いで報告されている。また、時期的には、前期の所産である「松菊里型住居」と、後期の所産である「花弁状間仕切り住居」を繋ぐ前期末や中期のものであるとの指摘もあり、注目されている。
이러한 야요이 시대의 큐슈에 대하여, 매우 특징적인 두 개의 수혈 주거가 존재한다.
 「송국리형주거」와「꽃잎장간 구분 주거」이다.전자는, 원형의 평면 플랜으로, 마루의 면 중앙부에 토갱과 2기의 주혈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한국의 청동기 시대, 초기 벼농사 관련의 유적으로서 유명한 「송국리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어 명명되었다.이 송국리형주거는, 佐賀県이나福岡県등 玄界灘沿岸의 북부 큐슈 지역을 중심으로, 야요이 시대 전기의 초기 벼농사 관련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이것은, 우리 나라의 초기 벼농사는, 대륙에서 한반도 경유로 전파 한 것의 방증이 되고 있다.그리고, 이 송국리형주거는, 高鍋町持田中尾遺跡이나 都城市肱穴遺跡등, 宮崎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후자는, 야요이 시대 후기의 미나미큐슈에 분포하는 특징적인 수혈 주거이다.평면형이 원형이나 방형에 판 수혈 주거의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향해 내다 붙여, 주거내의 공간을 나누고 있다.그 전체 평면형이, 꽃이 벌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부터 「꽃잎장간 구분 주거」라고 불리고 있다.마루의 면의 중앙에 토갱이나 2기의 주혈을 가지는 것도 볼 수 있는 것부터, 「송국리형주거」가 변용한 것으로 하는 의견도 보여진다.
 종래, 미나미큐슈에만 볼 수 있는 국지적인 주거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어 왔지만, 근년, 구마모토현・사가현・오이타현등의 중부・북부 큐슈 지역에서의 발견이 연달아 보고되고 있다.또, 시기적으로는, 전기의 소산인 「송국리형주거」라고, 후기의 소산인 「꽃잎장간 구분 주거」를 연결하는 전기말이나 중기의 것이다라는 지적도 있어, 주목받고 있다.



弥生時代の住居は、縄文時代の晩期に朝鮮半島からもたらされた「松菊里型住居」と縄文住居の重層として展開する。「松菊里型住居」が最初に発見されたのは、1968年のことである。韓国忠清南道の休岩里遺跡でみつかった住居跡は、円形平面の中央に大きな楕円形ピットをもち、左右対称の位置に2本の主柱穴が掘られていた。この特異な住居平面が発掘当初から注目されていたとすれば、「休岩里型住居」という呼称が与えられて然るべきであった。しかし、休岩里遺跡の報告書は1990年になってようやく刊行されたため、1975年から調査が始まった同じ忠清南道の松菊里遺跡での発見例が先行して有名に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経緯がある。それを学術用語として、最初に論文で使用したのは日本人の中間研二[1987]であった。中間は、「松菊里型住居」を朝鮮半島無文土器(青銅器)時代中期の住居としている。日本の縄文時代晩期から弥生時代中期にほぼ併行する時代である。
야요이 시대의 주거는, 죠몽 시대의 만기에 한반도로부터도 전해진 「송국리형주거」라고 죠몽 주거의 중층으로서 전개한다.「송국리형주거」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1968년의 일로이다.한국 충청남도의 휴암리유적에서 발견된 주거자취는, 원형 평면의 중앙에 큰 타원형 피트를 갖고, 좌우 대칭의 위치에 2개의 본 기둥구멍이 파지고 있었다.이 특이한 주거 평면이 발굴 당초부터 주목받고 있었다고 하면, 「휴암리형주거」라고 하는 호칭이 주어져 그에 적합한에서 만났다.그러나, 휴암리유적의 보고서는 1990년이 되어 간신히 간행되었기 때문에, 1975년부터 조사가 시작된 같은 충청남도의 송국리유적에서의 발견예가 선행해 유명하게 되어 버렸다고 하는 경위가 있다.그것을 학술 용어로서 최초로 논문으로 사용한 것은 일본인의 中間研二[1987]이었다.中間은, 「송국리형주거」를 한반도 무문 토기(청동기) 시대 중기의 주거로 하고 있다.일본의 죠몽 시대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 중기에 거의 병행 하는 시대이다.

松菊里型の住居
松菊里型住居は、朝鮮半島の松菊里遺跡でみられた、円形の竪穴住居の一種です。床中央に大きな穴を持ち、それに付随して小さな柱穴が相対する位置にほられています。松菊里型住居は、日本では北部九州地方などでみられ、朝日遺跡では、弥生時代中期前半ころの松菊里型住居が2軒みつかっています。
SA126は直径約7.6mの竪穴住居で、周溝を全周させています。床面には炭化物の他、赤色顔料が濃密に散布していました。床の中央には、両側に2つの柱穴を持つ穴があり、その中に焼土や炭化物が残っていました。また貯蔵穴には床面同様、赤色顔料が流れ込んでおり、内部から焼土、炭化物、管状骨製品をはじめとする獣魚骨がみつかっています。
61H・SB45も直径7.3mとほぼ同様の規模です。中央に小穴を伴う大きな穴を有し、6本の柱穴を持っています。
송국리형주거는, 한반도의 송국리유적에서 볼 수 있던, 원형의 수혈 주거의 일종입니다.마루 중앙에 큰 구멍을 가져, 거기에 부수 해 작은 주혈이 대립되는 위치에 뚫려져 있습니다.송국리형주거는, 일본에서는 북부 큐슈 지방등에서 볼 수 있고 朝日유적에서는, 야요이 시대 중기 전반무렵의 송국리형주거가 2채 발견되고 있습니다.
SA126는 직경 약 7.6 m의 수혈 주거에서, 주구를 사방 시키고 있습니다.마루의 면에는 탄화물의 외, 적색 안료가 농밀하게 살포하고 있었습니다.마루의 중앙에는, 양측으로 2개의 주혈을 가지는 구멍이 있어, 그 중에 토양을 태우는 일이나 탄화물이 남아 있었습니다.또 저장구멍에는 마루의 면 같이, 적색 안료가 흘러들고 있어 내부로부터 토양을 태우는 일, 탄화물, 관 모양 골제품을 시작으로 하는 수어골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61 H・SB45도 직경 7.3 m와 거의 같은 규모입니다.중앙에 작은 구멍을 수반하는 큰 구멍을 가져, 6개의 주혈을 가지고 있습니다.

松菊里型(系)竪穴住居
 松菊里型(系)竪穴住居は 1985年に忠清南道松菊里遺跡において見つかった円形間取り竪穴住居を標識タイプとして中間研志氏に
よって提唱されました。その特徴は竪穴床面中央にある中央土坑(ピット)とその土坑両端(脇)に各1つの柱穴があることで、日本においては弥生時代の円形間取り竪穴住居のことを主にいっています。近年大韓民国考古学者により柱穴のあり方などから朝鮮半島における地域性が指摘され、日本においても多様な形が見つかってきました。
 송국리형(계) 수혈 주거는 1985년에 충청남도송국리유적에 있어서 발견된 원형 배치 수혈 주거를 표지 타입으로서 中間研志씨에 의해서 제창되었습니다.그 특징은 수혈마루의 면 중앙에 있는 중앙토갱(피트)과 그 토갱양단에 각 1개의 주혈이 있는 것으로, 일본에 있어서는 야요이 시대의 원형 배치 수혈 주거를 주로 말하고 있습니다.근년 대한민국 고고학자에 의해 주혈의 본연의 자세등에서 한반도에 있어서의 지역성이 지적되어 일본에 있어도 다양한 형태가 발견되어 왔습니다.

分布と変遷
 これまでの調査によれば、弥生時代開始期にあたる春秋戦国時代や前漢時代の中国大陸においては確認されておらず、無文土器時代
の朝鮮半島や弥生時代の西日本の限られた地域に多くみられます。日本においては、太平洋側では愛知県尾張地域や長野県西南部、
日本海側では新潟県や長野県長野市近辺が分布の東限になり、北海道や東北地方、関東地方では確認されていません。
左ページに示したのは弥生時代前期と中期前葉の松菊里型(系)竪穴住居が確認された遺跡の分布です。
日本においては弥生時代前期に九州地方から東海地方西部に広がり、方形・長方形間取りの竪穴住居から松菊里型(系)竪穴住居に
変化しております。弥生時代中期前葉にはさらに東の愛知県に広がりますが、北九州地方ではすでに長方形間取り竪穴住居への変化がみ
られ、日本海側の地域や長野県へはやや遅れて広がるようです。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야요이 시대 개시기에 해당하는 춘추전국시대나 전한시대의 중국 대륙에 있어서는 확인되지 않고, 무문 토기 시대의 한반도나 야요이 시대의 서일본이 한정된 지역에 많이 볼 수 있습니다.일본에 있어서는, 태평양측에서는 愛知県尾張地域이나 長野県西南部, 일본해측에서는 新潟県이나 長野県長野市부근이 분포의 동한이 되어, 홋카이도나 동북지방, 관동지방에서는 확인되고 있지 않습니다.
윗 그림에 나타낸 것은 야요이 시대 전기와 중기전엽의 송국리형(계) 수혈 주거가 확인된 유적의 분포입니다.
일본에 있어서는 야요이 시대 전기에 큐슈 지방에서 동해 지방 서부에 퍼져, 방형・장방형 배치의 수혈 주거로부터 송국리형(계) 수혈 주거에 변화하고 있습니다.야요이 시대 중기전엽에는 한층 더 동쪽의 愛知県에 퍼집니다만, 키타큐슈 지방에서는 벌써 장방형 배치 수혈 주거에의 변화가 보여 일본해측의 지역이나 長野県에는 약간 지각해 퍼지는 것 같습니다.

起源
 松菊里型(系)竪穴住居の起源は中間氏が大韓民国にある遺跡名をつけているように、朝鮮半島にその起源があると考えられています。朝鮮半島で無文土器時代前期の忠清南道休岩里遺跡のものが最も古く、日本には朝鮮半島系の遺物が比較的多く見られる遺跡において多く見つかっていることが根拠です。しかし日本においても縄文時代晩期後半の福岡県松丸D遺跡においてすでに見られ、あまり時間
差なく伝わったようです。
 송국리형(계) 수혈 주거의 기원은 中間씨가 대한민국에 있는 유적명을 적고 있듯이, 한반도에 그 기원이 있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한반도에서 무문 토기 시대 전기의 충청남도휴암리유적의 것이 가장 낡고, 일본에는 한반도계의 유물이 비교적 많이 볼 수 있는 유적에 있어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 근거입니다.그러나 일본에 있어도 죠몽 시대 만기 후반의 후쿠오카현 마츠마루D유적에 있어 벌써 볼 수 있어 별로 시간차이 없게 전해진 것 같습니다.

終末
 松菊里型(系)竪穴住居の終末は、九州地方、四国西部地方、東海地方以東の地域では弥生時代中期後葉には方形・長方形間取り竪
穴住居に戻りますが、中国地方、近畿地方では弥生時代終末期(一部の地域では古墳時代前期)まで根強く営まれます。
 송국리형(계) 수혈 주거의 종말은, 큐슈 지방,四国서부 지방, 東海 지방 이동의 지역에서는 야요이 시대 중기 후손에게는 방형・장방형 배치 수혈 주거로 돌아옵니다만, 츄고쿠 지방, 킨키 지방에서는 야요이 시대 종말기(일부의 지역에서는 고분 시대 전기)까지 뿌리 깊게 영위됩니다.

問題点
 この松菊里型(系)竪穴住居が大韓民国・日本国両国の考古学者に注目されるのは何故でしょうか。私どもも含めて、このカタチの竪
穴住居が分布やその営まれる時期などから、朝鮮半島・日本における農耕文化の開始と極めて関連の深い現象と考えられているからに他
なりません。また松菊里型(系)竪穴住居のカタチが朝鮮半島や日本のそれまでの竪穴住居に比べて明らかに異なる特徴をもつことも大
きな要因と思われます。 それでは松菊里型(系)竪穴住居がどうして朝鮮半島や西日本の地域に広がったのでしょうか。もちろんその理由には稲作技術や金属器利用といったより大きな背景があるように思われますが、あくまでその主たる要因は当時の建築技術や建築伝統の中に存在し、この時代の竪穴住居は竪穴住居の中で変化すると思っています。そこで注目されるのは第1の特徴としてあげた中央土坑とその両端(脇)にある柱穴の存在です。松菊里型提唱者の中間氏は当初の松菊里型(系)竪穴住居には、中央土坑の底などに平坦な石などが置かれているものがあることと土坑の両脇にある柱穴の存在から、杵などによる穀類などの脱穀などの作業を想定されているようです。また中央土坑の周りで比較的石器製作の痕と思われる石器の未製品や石くずが発見されることから中央土坑には石器製作のための土坑としての役割も想定されています。
 이 송국리형(계) 수혈 주거가 대한민국・일본 양국의 고고학자에 주목받는 것은 왜입니까.저희들도 포함하고, 이 모양의 수혈 주거가 분포나 그 영위되는 시기등에서, 한반도・일본에 있어서의 농경 문화의 개시와 지극히 관련의 깊은 현상이라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인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또 송국리형(계) 수혈 주거의 모양이 한반도나 일본의 지금까지의 수혈 주거에 비해 분명하게 다른 특징을 가지는 것도 큰 요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송국리형(계) 수혈 주거가 어째서 한반도나 서일본의 지역에 퍼졌는지요.물론 그 이유에는 벼농사 기술이나 금속기 이용이라고 했던 것보다 큰 배경이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만, 어디까지나 그 주된 요인은 당시의 건축 기술이나 건축 전통안에 존재해, 이 시대의 수혈 주거는 수혈 주거안에서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거기서 주목받는 것은 제1의 특징으로서 준 중앙토갱과 그 양단(겨드랑이)에 있는 주혈의 존재입니다.송국리형제창자의 中間氏는 당초의송국리형(계) 수혈 주거에는, 중앙토갱의 바닥 등에 평탄한 돌등이 놓여져 있는 것이 있는 것으로 토갱의 양쪽 겨드랑이에 있는 주혈의 존재로부터, 저등에 의한 곡류등의 탈곡등의 작업이 상정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또 중앙토갱의 주위에서 비교적 석기 제작의 자국이라고 생각되는 석기의 미제품이나 돌쓰레기가 발견되는 것부터 중앙토갱에는 석기 제작을 위한 토갱으로서의 역할도 상정되고 있습니다.

http://m.blog.naver.com/marich77/40189846542

Sunday, October 23, 2016

more asians have perfect pitch than other races

Why do more Asians have perfect pitch?
Posted by Dave Munger on July 24, 2008

Several recent large-scale studies have confirmed a curious finding: Asians are much more likely to have “perfect pitch” than non-Asians. Perfect pitch, more properly called “Absolute pitch,” is an extremely rare phenomenon, but it’s several times more likely to occur in Asians than in others.
Studies have found that only 1 in 1,500 to 10,000 individuals possess absolute pitch. Part of the ability’s rarity is due to the fact that it’s really a combination of two abilities: pitch-memory — the ability to remember what a pitch sounds like, and pitch-labeling — the ability to name a pitch (A, B-flat, and so on). Pitch labeling can only come through training, but pitch memory does not require training.
So does the Asian advantage come from pitch labeling or pitch memory? Many people, even those with very little training, are able to remember the pitch of familiar songs. Daniel Levitin, for example, has found that most people can sing their favorite songs at pitches nearly identical to the popular versions played on the radio.
Glenn Shellenberg and Sandra Trehub realized that pitch memory might be the best way to uncover differences between Asians and non-Asians. They asked 70 kids, age 9 to 12, all living in the Toronto area, what their six favorite TV shows were. Half these kids were Asian and half were non-Asian. Then they played two different versions of each show’s theme song: one accurate, and one shifted up or down by two semitones (so if the original melody was C – D – E , the new version might be be D – E – F-sharp). The child was asked which was the correct melody — the one they heard on TV. Here are the results:

i-f7feb15ad5ed8265e3cd197f8f4fe92d-schellenberg.gif
There was no significant difference between Asians and non-Asians, which makes it unlikely that the Asian advantage in absolute pitch is due to genetic differences between Asians and non-Asians. The researchers did find a significant difference in math and spelling ability between groups, suggesting that if there were some difference in pitch memory, this study may have caught it.
The results can’t be explained by language differences either: while some of the Asian children didn’t speak their parents’ native language, others did, and there was no difference in pitch memory among these groups. Some researchers have argued that the Asian advantage in absolute pitch is related to the fact that many Asians speak tone languages, where different-pitched vowel sounds have different meanings. This work suggests that tone language alone can’t account for pitch memory differences.
So what does cause absolute pitch? There is no doubt that musical training is a key: people who begin musical training before the age of six are vastly more likely to develop absolute pitch than others. But even when training is taken into account, Asians still have an advantage. This study suggests that the advantage doesn’t seem to be related to pitch memory or tone language.
Other research has found that nearly all of the Asian advantage in absolute pitch is found among Asians who spent their early childhood in asia. This again points to cultural, not genetic factors. But it’s still possible that genetics plays an important role in pitch labeling — remember, pitch memory is just one component of absolute pitch.
E. Glenn Schellenberg, Sandra E. Trehub (2008). Is There an Asian Advantage for Pitch Memory? Music Perception, 25 (3), 241-252 DOI: 10.1525/mp.2008.25.3.241

http://scienceblogs.com/cognitivedaily/2008/07/24/why-do-more-asians-have-perfec/

yeshu and yeshua blasphemous name


Yeshu the name in Hebrew was originally used as a curse word to not name Jesus. Later Ashkenazi Jewish translators employed to get a comprehensive translation mistranslated or left it as the Hebrew name intentionally, according to some research.
According to the Babylonian Talmud (Sanhedrin 43a) the name is generally believed to be an acronym for י = Yimaḥ ש = Shĕmo ו = Wezikhro = meaning, May his name and memory be stricken out.[2] The oldest works in which references to Yeshu occur are the Tosefta and the Talmud, although some scholars consider the references to Yeshu to be post-Talmudic additions.[3]


Latin Roman engraving on the cross reads Iēsus Nazarēnus, Rēx Iūdaeōrum,
So Iesus is pronounced like the the Spanish do Esus if iam not mistaken. 

Anglicised : Jesus of Nazareth, king of Yudea,

In Greek the name becomes Ἰησοῦς / Iesous (the final sigma is added because in Greek the final sigma makes the name masculine, for example "petros" and "petra" both mean "rock" but petros is masculine and petra is feminine). From Greek the Latin name is derived yes.

Could this be the case, what is the his true name then.?
 
Nope. That's his Aramaic/Hebrew name! "Yeshua (ישוע, with vowel pointing יֵשׁוּעַ – yēšūă‘ in Hebrew)[1] was a common alternative form of the name יְהוֹשֻׁעַ ("Yehoshuah" – Joshua) in later books of the Hebrew Bible and among Jews of the Second Temple period. The name corresponds to the Greek spelling Iesous, from which, through the Latin Iesus, comes the English spelling Jesus."[2][3] (Wikipedia)
Lots of people conjure up a lot of etymological hoo-haw for purely personal, cultic, or pseudo-intellectual/professorial reasons. We call him Jesus for the same reason I am called Jon (John) in English, Juan in Spanish, Johann in German, Ivan in Russian, Giovanni in Italian, etc.
Period.
End of discussion.
Fini.
 

greek and italian food is the best food in the world comment

mishtran
4:42 PM
+
3

properly cooked Italian food is nothing short of amazing. They don't rely on spice and heavy seasoning like Asian food. Italian food highlights the natural ingredients in their dishes: sweetness come from ripe tomatoes and onion, not sugar, saltiness from seafood, from the cheese. Little of coarse salt goes a long way in Italian food. Sometimes you forget the real taste of ingredients in Asian food because it's masked in spice and sauce and oil. Have you ever taste sauce made from fresh sun ripe tomatoes, peeled and cooked simply in good fragrant olive oil, garlic and bit of pepper flakes. Then served on a bed of freshly made spaghetti? You can taste everything in each bite!

Now I'm an Asian and I'm telling you that you know squat about Italian food making such statements. I did not know how olive oil REALLY taste like until I visit Italy and Greece.

You probably taste shitty food so that's all you know!


https://www.youtube.com/watch?v=sgFKOiW02VI

Tuesday, October 18, 2016

for web browsing, AMD is better than Intel? comment


AMD CPU last longer than Intel CPU? comment

AMD units run cooler?

by GeBoulgaris / April 21, 2012 9:19 PM PDT

To my experience AMD units has reduced requirements on cooling and they live longer.
On the other hand INTEL has better support from microsoft.
If I m wrong please correct me.

https://www.cnet.com/forums/discussions/intel-vs-amd-cpu-in-desktop-does-it-matter-560188/

Monday, October 17, 2016

north africans are mediterranean race(greek race) comment

Ahmed Hicham 4:20 AM +orlando kaufusi as an egyptian living in egypt i can tell you that most of us are brown due to the sun(wich is not a mix of blacks and white as you think) like other mediterraneans,whites are few but blacks are even less than whites except in regions like luxor and aswan(once conquered by the sudaneese for too long) and nubia wich is not egyptian at all but got conquered by the egyptians since the 19th century


Haythem Nahdi
2016. 10. 24.
 
hey guys i m north african and her few people are black :)
 
 
https://www.youtube.com/watch?v=sZF28Lp5XIo

Sunday, October 16, 2016

Ancient Greek technology

Ancient Greek technology developed during the 5th century BC, continuing up to and including the Roman period, and beyond. Inventions that are credited to the ancient Greeks include the gear, screw, rotary mills, screw press, bronze casting techniques, water clock, water organ, torsion catapult, the use of steam to operate some experimental machines and toys, and a chart to find prime numbers. Many of these inventions occurred late in the Greek period, often inspired by the need to improve weapons and tactics in war. However, peaceful uses are shown by their early development of the watermill, a device which pointed to further exploitation on a large scale under the Romans. They developed surveying and mathematics to an advanced state, and many of their technical advances were published by philosophers, like Archimedes and Heron.


Water technology[edit]

Some fields that were encompassed in the area of water resources (mainly for urban use) included groundwater exploitation, construction of aqueducts for water supply, stormwater and wastewater sewerage systems, flood protection and drainage, construction and use of fountains, baths and other sanitary and purgatory facilities, and even recreational uses of water.[5]

Mining[edit]

The Greeks developed extensive silver mines at Laurium, the profits from which helped support the growth of Athens as a city-state. It involved mining the ore in underground galleries, washing it and smelting it to produce the metal. Elaborate washing tables still exist at the site, which used rain water held in cisterns and collected during the winter months. Mining also helped to create currency by the conversion of the metal into coinage.

Technology[edit]

The failure of the Greeks to develop their technology has sometimes been attributed to the low status of people providing labor. Manual labor was despised, and anyone applying science to it was likely to lose status in society, removing much of the incentive to seek technological innovation. A sophisticated tunnel built for an aqueduct in the 6th century BC by the engineer Eupalinos at Samos has led to some reevaluation of the skills of the Greeks.
TechnologyDateDescription
Archimedes Screwc. 3rd century BCThis device, capable of lifting solid or liquid substances from a lower plane to a higher elevation, is traditionally attributed to the Greek mathematician Archimedes of Syracuse.[6][7]Archimedes-screw one-screw-threads with-ball 3D-view animated small.gif
Streetsc. 400 BCExample: The Porta Rosa (4th–3rd century BC) was the main street of Elea (Italy) and connected the northern quarter to the southern quarter. The street is 5 meters wide. At its steepest, it has an inclination of 18%. It is paved with limestone blocks, griders cut in square blocks, and on one side a small gutter for the drainage of rain water. The building is dated during the time of the reorganization of the city during Hellenistic age. (4th to 3rd centuries BC)Greek street - III century BC - Porta Rosa - Velia - Italy.JPG
Cartographyc. 600 BCFirst widespread amalgamation of geographical maps developed by Anaximander, although it is possible he had been exposed to mapmaking practices of the Near East.[8]
Rutwayc. 600 BCThe 6 to 8.5 km long Diolkos represented a rudimentary form of railway.[9]Diolkos1.jpg
Differential gearsc. 100-70 BCThe Antikythera mechanism, from the Roman-era Antikythera wreck, employed a differential gear to determine the angle between the ecliptic positions of the sun and moon, and thus the phase of the moon.[10][11]Antikythera mechanism.svg
Caliper6th century BCEarliest example found in the Giglio wreck near the Italian coast. The wooden piece already featured one fixed and a movable jaw.[12][13]
Truss roof550 BC[14]See List of Greco-Roman roofs
Cranec. 515 BCLabor-saving device that allowed the employment of small and efficient work teams on construction sites. Later winches were added for heavy weights.[15]Trispastos scheme.svg
Escapement3rd century BCDescribed by the Greek engineer Philo of Byzantium (3rd century BC) in his technical treatise Pneumatics (chapter 31) as part of a washstand automaton for guests washing their hands. Philon's comment that "its construction is similar to that of clocks" indicates that such escapement mechanisms were already integrated in ancient water clocks.[16]Washstand automaton
Tumbler lockc. 5th century BCThe tumbler lock, as well as other varieties of lock, was introduced in Greece in the 5th century BC.
Gearsc. 5th century BCDeveloped further than in prehistoric times for a variety of practical purposes.
Plumbingc. 5th century BCAlthough there is evidence for Sanitation of the Indus Valley Civilisation, the ancient Greek civilization of Crete, known as the Minoan civilization, was the first civilization to use underground clay pipes for sanitation and water supply.[17] Excavations at Olympus, as well as Athens, have revealed extensive plumbing systems for baths, fountains, and personal use.
Spiral staircase480–470 BCThe earliest spiral staircases appear in Temple A in Selinunte, Sicily, to both sides of the cella. The temple was constructed around 480–470 BC.[18]Plan of ground floor of Temple A at Selinunte (c. 480 BC). The remains of the two spiral stairs between the pronao and the cella are the oldest known to date.
Urban planningc. 5th century BCMiletus is one of the first known towns in the world to have a grid-like plan for residential and public areas. It accomplished this feat through a variety of related innovations in areas such as surveying.
Winch5th century BCThe earliest literary reference to a winch can be found in the account of Herodotus of Halicarnassus on the Persian Wars (Histories 7.36), where he describes how wooden winches were used to tighten the cables for a pontoon bridge across the Hellespont in 480 BC. Winches may have been employed even earlier in Assyria, though. By the 4th century BC, winch and pulley hoists were regarded by Aristotle as common for architectural use (Mech. 18; 853b10-13).[19]
Showers4th century BCA shower room for female athletes with plumbed-in water is depicted on an Athenian vase. A whole complex of shower-baths was also found in a 2nd-century BC gymnasium at Pergamum.[20]
Central heatingc. 350 BCGreat Temple of Ephesus was warmed by heated air that was circulated through flues laid in the floor.
Lead sheathingc. 350 BCTo protect a ship's hull from boring creatures; see Kyrenia ship
Astrolabec. 300 BCFirst used around 200 BC by astronomers in Greece. Used to determine the altitude of objects in the sky.[21][22]
Canal lockearly 3rd century BCBuilt into Ancient Suez Canal under Ptolemy II (283–246 BC).[23][24][25]
Ancient Suez Canalearly 3rd century BCOpened by Greek engineers under Ptolemy II (283–246 BC), following earlier, probably only partly successful attempts.[26]
Lighthousec. 3rd century BCAccording to Homeric legend, Palamidis of Nafplio invented the first lighthouse, although they are certainly attested with the Lighthouse of Alexandria (designed and constructed by Sostratus of Cnidus) and the Colossus of Rhodes. However, Themistocles had earlier established a lighthouse at the harbor of Piraeus connected to Athens in the 5th century BC, essentially a small stone column with a fire beacon.[27]PHAROS2006.jpg
Water wheel3rd century BCFirst described by Philo of Byzantium (c. 280–220 BC).[28]
Alarm clock3rd century BCThe Hellenistic engineer and inventor Ctesibius (fl. 285–222 BC) fitted his clepsydras with a dial and pointer for indicating the time, and added elaborate "alarm systems, which could be made to drop pebbles on a gong, or blow trumpets (by forcing bell-jars down into water and taking the compressed air through a beating reed) at pre-set times" (Vitruv 11.11).[29]
Odometerc. 3rd century BCOdometer, a device used in the late Hellenistic time and by Romans for indicating the distance travelled by a vehicle. It was invented sometime in the 3rd century BC. Some historians attribute it to Archimedes, others to Heron of Alexandria. It helped revolutionize the building of roads and travelling by them by accurately measuring distance and being able to carefully illustrate this with a milestone.
Chain drive3rd century BCFirst described by Philo of Byzantium, the device powered a repeating crossbow, the first known of its kind.[30]
Cannonc. 3rd century BCCtesibius of Alexandria invented a primitive form of the cannon, operated by compressed air.
Double-action principle3rd century BCUniversal mechanical principle that was discovered and first applied by the engineer Ctesibius in his double action piston pump, which was later developed further by Heron to a fire hose (see below).[31]
Leversc. 260 BCFirst described about 260 BC by the ancient Greek mathematician Archimedes. Although used in prehistoric times, they were first put to practical use for more developed technologies in Ancient Greece.[32]
Water millc. 250 BCThe use of water power was pioneered by the Greeks: The earliest mention of a water mill in history occurs in Philo's Pneumatics, previously been regarded as a later Arabic interpolation, but according to recent research to be of authentic Greek origin.[1][33]
Three-masted ship (mizzen)c. 240 BC:First recorded for Syracusia as well as other Syracusan (merchant) ships under Hiero II of Syracuse[34]
Gimbal3rd century BCThe inventor Philo of Byzantium (280–220 BC) described an eight-sided ink pot with an opening on each side, which can be turned so that any face is on top, dip in a pen and ink it-yet the ink never runs out through the holes of the side. This was done by the suspension of the inkwell at the center, which was mounted on a series of concentric metal rings which remained stationary no matter which way the pot turns itself.[35]Rotating gimbal-xyz.gif
Fore-and-aft rig (spritsail)2nd century BCSpritsails, the earliest fore-and-aft rigs, appeared in the 2nd century BC in the Aegean Sea on small Greek craft.[36]Here a spritsail used on a Roman merchant ship (3rd century AD).
Air and water pumpsc. 2nd century BCCtesibius and various other Greeks of Alexandria of the period developed and put to practical use various air and water pumps which served a variety of purposes,[37] such as a water organ and, by the 1st century AD, Heron's fountain.
Sakia gear2nd century BCFirst appeared in 2nd-BC Hellenistic Egypt, where pictorial evidence already showed it fully developed[38]
Surveying toolsc. 2nd century BCVarious records relating to mentions of surveying tools have been discovered, mostly in Alexandrian sources, these greatly helped the development of the precision of Roman aqueducts.
Analog computersc. 150 BCIn 1900–1901, the Antikythera mechanism was found in the Antikythera wreck. It is thought that this device was an analog computer designed to calculate astronomical positions and was used to predict lunar and solar eclipses based on Babylonian arithmetic-progression cycles. Whereas the Antikythera mechanism is considered a proper analog computer, the astrolabe (also invented by the Greeks) may be considered as a forerunner.[39]NAMA Machine d'Anticythère 1.jpg
Fire hose1st century BCInvented by Heron in the basis of Ctesibius' double action piston pump.[31] Allowed for more efficient fire fighting.
Vending machine1st century BCThe first vending machine was described by Heron of Alexandria. His machine accepted a coin and then dispensed a fixed amount of holy water. When the coin was deposited, it fell upon a pan attached to a lever. The lever opened up a valve, which let some water flow out. The pan continued to tilt with the weight of the coin until it fell off, at which point a counter-weight would snap the lever back up and turn off the valve.[31]
Wind vane50 BCThe Tower of the Winds on the Roman agora in Athens featured atop a wind vane in the form of a bronze Triton holding a rod in his outstretched hand rotating to the wind blowing. Below, its frieze was adorned with the eight wind deities. The 8 m high structure also featured sundials and a water clock inside dates from around 50 BC.[40]
Clock tower50 BCSee Clock tower.[41]Tower of the Winds
Automatic doorsc. 1st century ADHeron of Alexandria, a 1st-century BC inventor from Alexandria, Egypt, created schematics for automatic doors to be used in a temple with the aid of steam power.[31]



https://en.wikipedia.org/wiki/Ancient_Greek_technology

greek science

Thales of Miletus is regarded by many as the father of science; he was the first Greek philosopher to seek to explain the physical world in terms of natural rather than supernatural causes.
Science in Ancient Greece was based on logical thinking and mathematics. It was also based on technology and everyday life. The arts in Ancient Greece were sculptors and painters. The Greeks wanted to know more about the world, the heavens and themselves. People studied about the sky, sun, moon, and the planets. The Greeks found that the earth was round.
Eratosthenes of Alexandria, who died about 194 BC, wrote on astronomy and geography, but his work is known mainly from later summaries. He is credited with being the first person to measure the Earth's circumference.

Botany

Greek influence on agriculture was the establishment of the science of botany. Botany is the study of all aspects of plant life, including where plants live and how they grow. The Greek philosopher Aristotle, who lived during the 300's BC, collected information about most of the plants known at that time in the world. He also studied other sciences and math.
His student Theophrastus classified and named these plants. Theophrastus often called the father of botany. Aristotle and Theophrastus developed an extremely important type of science that is studied all over the world. Botany is so important because all the food that animals and people eat comes from plants, whether it be directly or indirectly.

Earth Science

Earth science is the study of the earth and its origin and development. It deals with the physical makeup and structure of the Earth. The most extensive fields of Earth science, geology, has an ancient history.
Ancient Greek philosophers proposed many theories to account for the from and origin of the Earth. Eratosthenes, a scientist of ancient Greece, made the first accurate measurement of the Earth's diameter. The ancient Greek philosophers were amazed by volcanoes and earthquakes. They made many attempts to explain them, but most of these attempts to explain these phenomena sound very strange to most people today. For example, Aristotle, speculated that earthquakes resulted from winds within the Earth caused by the Earth's own heat and heat from the sun. Volcanoes, he thought, marked the points at which these winds finally escaped from inside the Earth into the atmosphere.
Earth science allows us to locate metal and mineral deposits. Earth scientists study fossils. This helps provide information about evolution and the development of the earth. Earth science helps in locating fossil fuels, such as oil. These fuels compose a major part of the world economy. The Greeks came up with the idea of earth science, and most importantly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cientists who lived hundreds of years after their time.

Public Water Works

Public works were one of the greatest influences in Ancient Greece. They helped boost the economy, and acted as an art form, and they also led to a more sanitary life style. The system of planning the public works was invented by Hippodamus of Miletus, and was admired throughout the Hellenistic and Roman periods. Cities were built according to this scheme and old towns were reconstructed to fit this system. The Greeks were proud of the establishment of the public works and spent a lot of money on it.
There were many ways to bring water into the city for people to use. Many great thinkers such as Archimedes, Hero, and Eupalinus discovered extraordinary ways to draw water more economically to the cities of Greece. Of all the many different inventions, there were three major inventions that made important contributions to the water supply of Greece.
The three inventions are:

  • Archimedes' Screw - Archimedes, one of the greatest thinkers of ancient Greece, developed this invention. It was used to lift water from a lower elevation to a higher elevation by means of a tube that is internally threaded. The threads on the inside collect water and as the tube rotates, the water is brought up and put into a storage tank. This massive device was run by human power. The person running the screw, usually a slave, held onto a rail at the top and used his own muscle power to propel the water upward.
  • Aqueducts and Bridging - The Greeks also used techniques such as aqueducts and bridging valleys. They used these devices because the Greeks thought that the water could only be moved if it was moving downward or on a straight path. So in order to keep the water flowing they built aqueducts through mountains and built bridges over valleys. In the sixth century a Greek engineer by the name of Eupalinus of Megara built the aqueduct of Samos. This tunnel measured more than 3000 ft. long and it was started on opposite ends hoping to meet in the middle. When the two met, the tunnels were only fifteen ft. off from each other. On the average, aqueducts were about fourteen feet deep and they were completely lined with stone. The aqueducts were either single route or they branched off into many branches that supplied different areas with water. There was also a form of manhole covers that allowed the workers to access the aqueduct more easily if work needed to be done.
  • Siphon Principle - Hero, a Greek who lived after 150 B.C. was the first hydraulic engineer. He modernized the obtaining of water through a method known as the siphon principle. The siphon principle allows the pipes that carry the water to follow the terrain of the land and the aqueduct and bridging techniques were no longer used as often. For example, such a device was used for the citadel at Pergamon. The pipes that connected to the citadel had approximately 300 pounds of pressure per square inch and the pipes were most likely made of metal in order to withstand the pressure. Priests chosen to pray to Apollo had to drink from a secret spring at Colophon before praying. This water was thought to shorten the lives of the priests. The spring has very deep meaning because it was supposed to have formed from the tears of a prophetess. She had wept over the destruction of Thebes, her native city. There is also a punishment in Hell that uses water. People that were unmarried or uninitiated during their lives had the same punishment. The task was to fetch water from either a well or a stream and fill a broken, leaky wine vase for eternity.
    The slaves who had the responsibility of cleaning and repairing all of the public utilities. The more progressive cities had drains under the street that carried both fresh water and sewage. At times these slaves were used to watch over the fountains so that no one did their laundry or bathed in it. They also had to make sure that money thrown into the fountain for luck was not stolen by anyone.
    Most of the public water-supply was used for public buildings, such as baths and street fountains. For example, in Alexandria, in Egypt, each house had a personal cistern for their own water for their own use. The slaves also had to clean these cisterns. These private owners of cisterns and users of water had to pay a water rate to the city. It is sort of like the first public utilities company.

    Biology
    Many important people contributed to Greek scientific thought and discoveries. Biology, a very vast and interesting topic, was studied by Hippocrates, Aristotle, Theophrastus, Dioscorides, Pliny, and Galen. These men were among the main researchers of Greek biology who contributed many ideas, theories, and discoveries to science. Some of their discoveries were observations, descriptions, and classifications of the various forms of plants and animal life. Other discussions in biology were natural selection and zoology.
    All living things were the basic concern of biology. Greek biologists were interested in how living things began, how they developed, how they functioned, and where they were found. These sorts of questions that ran through the biologists' minds are exactly how they began to discover the basics of life. At such an early time, about 300 B.C., science was just beginning to enter the minds of the Greeks. Aristotle, a Greek biologist, made contributions of his own to science. However, around 300 B.C. there was much more to be discovered, which enabled other scientists to add knowledge to the discoveries of Aristotle, during and after his time.
    Natural Selection is the manner in which species evolve to fit their environment - "survival of the fittest." Those individuals best suited to the local environment leave the most offspring, transmitting their genes in the process. This natural selection results in adaptation, the accumulation of the genetic variations that are favored by the environment.
    Many Greek scientists thought about natural selection and the origin of life. Anaximander believed that marine life was the first life on Earth and that changes happened to animals when they moved to dry land. Empedocles had the idea of chance combinations of organs arising and dying out because of their lack of adaptation. Aristotle, a Greek philosopher who contributed many works in the sciences, believed that there is purpose in the workings of nature, and mistakes are also made. He thought that nature working so perfectly is a necessity.
    Aristotle believed that nature is everything in the environment, like the sky rains, and the plants grow from the sun. Aristotle's theory fits very well with natural selection.
    Natural selection makes it necessary for animals and nature fit perfectly - 'survival of the fittest'. If they didn't, then that specific organism would die out, weeding out the characteristics that were unfit for that environment.
    That same organism's species might evolve over time and acquire adaptations suitable for the environment, so that newly evolved species can survive and flourish with offspring.
    Lucretius, who lived about 50 AD in Rome, believed that evolution was based on chance combinations; heredity and sexual reproduction entered only after earth itself had developed. Then with the organism developing characteristics that might make for survival in the environment, the organisms that don't have favorable characteristics are incapable of survival and disappear. These ideas from Greek scientists are all theories, of course, but the fossil evidence suggests that species evolved over time.

    Zoology
    Zoology is the study of animals, involves studying the different species of animals, the environment in which they live, and their organs. Aristotle was very persistent with his studies of the zoological sciences and made many contributions to how we study zoology today. He made observations on the anatomy of octopi, cuttlefish, crustaceans, and many other marine invertebrates that were remarkably accurate. These discoveries on the anatomy could have only been made by dissecting the animals. Through dissection, Greek zoologists studied the structures and functions of anatomies of various animals. Some structures that were studied were bones and membranes. However, to discover and learn about the diversity of animals, Greek zoologists had to narrow their areas of study by attempting to classify the organisms.

  • http://www.crystalinks.com/greekscienc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