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4, 2017

나치독일의 일본제국에 대한 음악 영향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에서 활동한 일본 음악가

이경분

1. 시작하며
일본인과 서양인의 교류를 소재로 삼은 유명한 음악적 예는 (1900년대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1904)이다. 여기서 나비부인 고
코상(ここさん)이 선망하고 사랑하는 서양인 핑커튼은 미국인이지만, 이 시기 일본
인이 선망하는 음악가는 독일인이었다. 일본의 첫 양악 연주회(1887) 레퍼토리는
베토벤 교향곡 1번(2악장과 3악장만)이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초 일본의 주도적인
음악가들은 거의 독일에서 수학하였다.1)

하지만 일본에서 독일 음악의 영향력이 더욱 가시화되는 것은 나치정권이 들
어서고 난 후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일본의 동맹관계는 양국의 음
악문화 교류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2006년, 나치제국에서 활동했던 안익태
* 지은이│이경분 부산대학교 독어과 졸업 후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독일 망명문학에 관한 논문으로 독문학 석사학위
를, 동대학에서 나치 시기 독일망명음악에 관한 주제로 음악학 박사를 취득한 후 서울대, 한양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를 지내다가 현재 도쿄대학 총합문화연구과 (비교문화비교문학) 객원연구원으로 안익태를 비롯한 식민지 한국음악인과 일
본음악문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Musik und Literatur im Exil(New York, 2001), 『망명음악 나치음악』(책세상,
2004), 『잃어버린 시간 1938~1944』(휴머니스트, 2007), 『프로파간다와 음악』(서강대학교출판부, 2009) 등이 있는데, 주연
구분야는 독일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음악과 정치의 관계로, 현재 일본제국주의의 음악문화와 식민지 한국음악문화에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 이 연구는 2008년도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학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다.
1) Yukiko Sawabe, “Japan”, MGG(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Bd. 4, Bärenreiter Kassel/Metzler :
Stuttgart Weimar, 1374. 물론 이것은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베토벤, 바그너 등 19세기 독일 음악가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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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한 자료 발굴을 위해 베를린과 코블렌츠의 국립문서보관소(Bundesarchiv)를
방문했을 때, 전쟁 중에 활동한 일본 음악가들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 보존되어 있
는 문서들을 발견하고 적지 않게 놀랐다. 나치독일의 패망이 확실해졌을 즈음, 나
치들이 자신들의 중요한 문서를 폐기하였고, 더욱이 연합군의 무차별적 융단폭격
으로 인해 대부분 서류들이 손상되었지만, 전쟁 시기 일본과 독일의 문화교류 관련
서류(294권)는 전쟁을 겪지 않은 듯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안
익태(1906~1965)를 비롯하여 지휘자 고노에 히데마로(近衛秀磨, 1898~1973), 오
타카 히사타다(尾高尙忠, 1911~1951), 바이올리니스트 스바 네지코(諏訪根自子,
1920~), 성악가 다나카 미치코(田中路子, 1913~1988) 등2)의 활동에 관해서는 매우
풍부하고 상세한 자료가 소장되어 있었다. 특히,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자료는 오
타카 히사타다가 독일인과 교환한 여러 통의 자필편지였는데, 붓으로 쓴 듯 정교한
필체가 마치 서예작품 같은 인상마저 주었다.
그 후 2008년 11월, 안익태 자료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일본학자들의 초청
으로 도쿄대학에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제3제국에서 일본 음악가 안 에키타이
의 캐리어」(Mit dem Strom der Geschichte: Ekitai Ahns Karriere als japanischer
Musiker im Dritten Reich)에 대해 강연을 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 참석한 진취적인
일본 음악학자들에게 이 자료에 대해 어느 정도로 연구가 되어 있는지 일본 음악학
계의 동향을 물으니,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3)
일본 음악학계도 한국 음악학계처럼 그동안 유럽 본토의 음악연구에 더 큰 비
중을 두었다가 최근에 와서야 일본 내의 서양음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학자가 늘
2) 여기서 언급된 음악가 모두 五味絃子・松原 正(編) 外, 『音楽家人名事典』, 東京 :日外アソシエーツ, 1991 참고.
3) 물론 독일에서 유학하고 일본인으로서 처음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도 지휘했던 기시 고이치(貴志康一)에 대한 나카
마미코(仲方美子)의 연구는 부분적으로 코블렌츠 국립문서보관소의 자료를 이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방대한
자료에 대한 정보가 미미할 뿐 아니라, 체계적인 연구는 아직 전무한 상황이다. 강연회에 참석했던 한 고노에 전문가는 고
노에의 일본 자료에만 의존하여 독일 자료를 전혀 알지 못했는데,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중에 일본에서 고노에의 과거도
왜곡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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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2007년 일본전후음악사연구회(日本戦後音樂史硏究会)는
『일본전후의 음악사』(日本戦後音楽史 上, 下) 2권을 펴내었고, 또 일본 음악문화연
구회(音楽文化硏究会)는 전쟁 시기 음악의 프로파간다 역할에 대한 연구서 『음악
을 동원하라—통제와 오락의 15년간 전쟁』(音楽を動員せよ—統制と娛楽の十五年
戦争, 2008)과 『총력전과 음악문화—음과 소리의 전쟁』(総力戦と音楽文化—音と
聲の戦争, 2008)이라는 연구서를 발표하였지만, 나치제국에서의 일본 음악가들에
대한 활동은 아직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4)
음악과 전쟁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가? 모든 국가권력이 전쟁프로파간다를
위해 음악을 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나치제국은
그 어떤 정권보다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음악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시
체 태우는 냄새, 학살하는 소리를 희석하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
는 데 음악은 교묘하게 이용될 수 있었다.5) 나치제국의 음악정책이라는 틀 속에서
고노에와 안익태, 스바와 다나카 그리고 오타카 같은 일본 음악가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또 어떤 조직에 의해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는가? 또 이들은 어떤 음악 레퍼토리를 연주하였고, 그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일본 음악학계에서 지금껏 구체적으로 연구되지 못한 이 의문을 독일 코블렌츠 국
립문서보관소의 자료를 통해 풀어 보고자 한다.
2.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대하여
전쟁을 위한 프로파간다에서 음악은 나치독일이나 일본제국의 통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매체이자 수단이었다. 정책적으로 프로파간다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
4) 조키 세이지(長木誠司)가 『제3제국과 음악가들』(弟3帝国と音楽家たち, 1998, 音楽之友社)을 발표하였지만, 일본과 독일의
관계는 일본에 망명한 유대인 음악가 만프레트 구를리트(8장)에 국한하여 다루고 있다.
5) 이경분, 「전쟁, 살인 그리고 음악—나치제국에서 음악의 역할」, 『역사비평』 80호, 역사문제연구소, 2007 가을, 479~4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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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음악인들의 산발적인 활동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원화된 조직과 체계
적인 동원시스템이 필요했다. 이에 원래 사적인 성격의 단체였으나, 독일과 일본의
문화교류의 실무를 위해 독일 국가기관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나치정부의 지
원을 받게 되었던 독일협회(獨日協會,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
6)라는 단
체가 점차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물론 독일외교부에는 ‘국가간 업무’를 담
당하는 사무실이 있었으나, 전쟁 시기에 독일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관한 실무는 독
일협회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부터 독일협회7)라는 이
름으로 나치문화정책에 기여했던 이 단체의 문서로만 보면, 일본 음악가가 독일에
서 음악활동을 하는 경우는 평화로운 시기(1933~1938)보다 전쟁 시기(전쟁 말기를
제외한 1939년부터 1943년)에 더 활발한 양상을 보인다. 1936년 11월 25일, 독일
과 일본이 반공산주의협약을 맺고, 1938년 11월 독일과 일본의 문화협정이 체결
된 후, 점차 양국의 우애를 과시하는 음악 행사가 양적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가 삼국 동맹(1940. 9. 27)을 맺음으로써
이제 독일과 일본의 음악문화교류는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참고로 한 가지 강조한다면, 독일협회는 음악문화만이 아니라,
양국의 문화교류 전반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남아 있는 독일협회의 문서를 보면,
대중적 영향력이 큰 영화 상영은 물론이고, 연극, 무용, 미술전시회, 강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활발했다.8) 독일협회의 문서에는 1945년 봄까지도 독일협회 건물이
건재한 곳에서는 (물론 실제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과 관련된 강연회, 영화
상영 등에 대한 계획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두 매체가 당시 전쟁 상황에서 프로파
6) 안익태의 유럽활동을 연구한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휴머니스트, 2007)에서는 의미전달의 오해를 염려하여
“독일(獨日)협회”대신 “일독회”라고 번역하였다.
7) 나치시기 이전에는 화독회라는 이름으로 일본인과 독일인의 친교적인 모임의 성격이 강했다. 유대인 회원이 많이 들어있
었던 것도 1933년 이후의 독일협회와 차이점이다.
8) 미술전시회와 연극, 무용에 관한 언급은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79~80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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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를 위해 가장 필요했고, 또 가장 영향력이 컸음을 의미한다. 음악에만 편중하여
서술한다면 왜곡된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먼저 강연회와 영화 상영 행사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1) 일본관련 강연회
이미 19세기에 서양인에게 낯선 아시아의 일본 문화는 엑소티시즘의 대상이었지
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이 독일과 정치적으로 대등한 파트너가 되었다는 것
은 상대국의 문화를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됨을 의미한다. 독
일 청중에게 일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강연회는 일본을 이해하는 데 체계적
인 접근을 도와 준다는 점에서 필수적이었다 할 수 있다. 독일협회가 기획하고 관
여한 강연회는 일본의 전통, 문화, 예술, 정치, 사회, 여행 체험기 등 매우 포괄적
인 내용을 담고 있다.9) 예를 들면 ‘일본의 서정시’(Japanische Lyrik ;Überschaar),
‘일본 음악의 실체’(Wesen japanischer Musik ;Hans Eckardt), ‘일본의 연극예술’
(Schauspielkunst Japans ;Maria Piper), 또 ‘일본의 국민교육’(Nationale Erziehung
in Japan ;Kurt Meissner), ‘천황과 일본의 승리’(Das Tennotum und der Sieg
Japans ;Sakuma Shin), ‘대동아 공영권을 위한 일본의 투쟁’(Japans Kampf um
den Großraum Ostasien ;Richard Foerster), ‘만주에 관하여’(大島浩), ‘일본과 전
함군수산업문제’(Japan und Flottenrüstungsfrage ;Sugishita Yujiro)
10) 등 다양하
다. 특히 일본의 천황제와 신토이즘(Shintoism), 무사도는 일본인의 강한 정신적
근원으로 늘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특히 독
일시민과 군인들에게 이를 모범으로 내세우고, 본받을 것을 세뇌하고자 하는 강연
9) 강연자의 2/3가 독일인이고 1/3을 일본인이 차지한다. Günther Haasch(Hg.), Die Deutsch-Japanischen
Gesellschaften 1888~1996, Berlin, 1996, p. 225.
10) 강의의 영문 제목 뒤에 세미콜론( ; )으로 구분하여 강사들의 이름을 명기했다. 독일 자료를 참고로 하였으므로 일본명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독일어 표기를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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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훨씬 잦아진다.
예를 들면, 특히 독일협회 회장이었던 푀르스터가 전쟁이 발발하기 전(1939
년 여름) 일본을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일본의 투쟁’이
라는 제목의 강연회는 오히려 1942년 3월 전쟁의 맥락에서 많은 청중을 동원할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약 1,800명, 다름슈타트에서 약 1,500명, 마인츠에서
2,500여 명, 기센에서 800여 명이 몰려왔다고 한다.11)
이런 강연회를 적극 개최한 배경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으로 승승장구
하는 동맹국 일본의 기세를 모범으로 보여 주고 전쟁에 지쳐 가는 독일시민들에게
굳건한 정신과 에너지를 부여하고자 하는 나치기관의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전쟁
시기 가장 큰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으므로, 특히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과 천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본군인 정신을 강조하는 강연회가 많은 것도 어
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삼국동맹이 역사적 사실이었으므로 달리 의문을 품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엄밀하게 따져 보면 황색인종 일본이 백인인 독일 및 이탈
리아와 같은 편에 서서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인종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히틀러와 나치 들은 아시아인들을 ‘황인종의 위험’(Gelbe
Gefahr)이라고 말해 왔으며, 아시아인들을 유럽 아리아인들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왔고, 독일에서 실제로 일본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차별대우를 받은 경우가 적
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인종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황색인을 삼국
동맹에 끌어들여 동등한 공식적 파트너로 인정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실제의 간극
을 암시한다.12)
11) 이 강연이 독일협회만의 행사는 아니었고, ‘기쁨을 통한 힘 단체’(Kraft durch Freude)가 함께 기획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훨씬 동원력이 컸던 것이라 추측할 수 있으며, 순수하게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라기보다 오히려 전쟁 시기 프로파간다
적 동원으로 볼 수 있다. BA Kobl R 64 IV/175, pp. 7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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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은 독일의 입장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1941년 12월 8일, 일
본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시작했을 때, 일본은 이를 백인과 서양
에 대한 전쟁으로 선포하였다.12) 그런데 독일인이나 이탈리아인도 외형상 미국인과
구별하기 힘든 백인이었으므로, 서양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왜 독일인, 이탈리아인
은 제외되었는지 애매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동맹관계와 상관없이 태평양전쟁 시
기 백인 일반에게 보내는 일본인의 의심에 찬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던 것은 1942
년 4월 일본 내의 모든 일본의 유럽 동맹국 나라 대사들도 특별 허가서 없이는 함부
로 일본 내에서 여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13)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실제와의 괴리를 다른 차원에서 보여 주는 또다른 예로
는 유럽 전쟁 전에,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온 독일인들의 강연회이다. 특히 일본의
상하이 점령 당시 독일의 기자로 만주, 상하이, 일본 등지에서 2년간 체류했던 롤
란트 슈툰크(Roland Stunk)의 강연(1934)과 이에 관한 독일협회의 보고서가 흥미
롭다. 그는 아마도 한반도에도 잠시 머물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조선합병을 “일
본의 평화적인 식민지 통치의 대표적인 예”로서 손꼽으며, “1932년 3천만 만주인
도 즐겁고 행복해 하며”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고 보고한다.14) 하지만 독일협회
의 내부 문서에는 독일 강연자가 중국 및 아시아문제를 이야기할 때, 일본 청중이
함께 있을 때와 독일인들만 모여 있을 때에 상당히 다른 견해를 보인다고 서술되어
있다.15)
사실을 각색한 독일 감독 플로리안 갈렌베르거(Florian Gallenberg)의 2009
12) “미국을 중립화”시키고자 하는 전략을 위해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Bernd Martin, “Der Schein des Bündnisses—
Deutschland und Japan im Krieg (1940~1945)”, p. 33.
13) Ibid, pp. 32~33. 일본이 점령한 중국 내에서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백인들은 의심스러운 외국인으로 강제로 수용
당했는데, 독일인임을 증명하면 어려움 없이 풀려날 수 있었다. 독일에서 만주로 망명 온 유대인 음악가 헬무트 슈테른
(Helmut Stern)은 『끊어진 바이올린 선』(Saitensprünge, Berlin, 2000)에서 1941년 12월 8일의 경험을 회고하고 있다.
14) 1934. 5. 30. 독일협회 보고서, BA Kobl R 64 IV/236, p. 395.
15) BA Kobl R 64 IV/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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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영화 「존 라베」(John Rabe)
16)에서 보듯이, 나치당원이고 독일 지멘스사의 중국
책임자였던 라베가 1937년 난징에서 일본의 잔인한 중국인 학살에 대해 오히려 일
본군에 대항하여 중국인을 도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당시 여전히 중국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던 독일인들이 많았으며,17) 독일협회 내
부에서도 남의 일은 오히려 객관적으로 보았던 독일인들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
다. 하지만 일본이 무력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이나, 일본군대의 난징학살과 같은 이
야기는 일본대사관 관계자 및 일본인들이 참석한 강연회나 간담회에서는 언급을
피했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무엇보다도 독일협회가 일본대사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었고, 더욱이 독일
쪽도 유대인 학살문제를 일본인이 거론하게 되면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과 마찬가
지였을 것이다.
이미 독일과 일본의 동맹이 거의 설득력이 없어진18) 문서상의 문구에 지나지
않았던 1944/45년 겨울, 폭격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에서 강연장소를 구하기도 힘
들었음에도 독일협회의 강연회 계획은 포기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독일협회의 강연을 독일 라디오방송에서 대체했을 정도였다.19)
16) 이 영화는 1996년에 공개된 라베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라베가 히틀러에게 일본의 만행을 중지시켜 달라는 서한
을 보냈지만 히틀러의 반응은 싸늘했고, 그가 귀국했을 때 오히려 SS의 심문을 받았던 것에 대해서 영화는 다루지 않고
있다. 아이리스 장, 윤지환 옮김,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 미다스북스 2006, 161~
178쪽.
17) 일본이 중국을 점령한 후, 모든 이권을 독점하였으므로, 중국에서 이권을 가졌던 독일인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18) 삼국의 군사동맹이 맺어진 지 거의 2년이 지난 1943년 12월에는 이탈리아가 이미 항복하였으므로, 삼국동맹의 실체가
무너진 것과 다름 아니었다. 1943년 10월 23/24일 밤, 연합군의 베를린공습 때, 일본 대사관 옆 영사관 건물도 폭격으
로 불이 났다. 일본대사관은 정원에 벙커를 만들어 놓았지만, 점차 소련군의 진격이 거세지는 전쟁상황에서 1945년 4
월 14일 일본 대사와 10대 이상의 자동차 행렬은 베를린을 떠나 잘츠부르크 근교로 일본대사관을 옮기게 된다. Tajima
Nobuo, “Die japanische Botschaft in Berlin in nationalsozialistischer Zeit-Personal und Politik”, pp. 69~70. 더욱
이 1943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 2주년 기념식은 새로 지은 베를린의 일본대사관 건물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연합
군의 폭격을 맞아 손상되었으므로 겨우 창문만은 새로 끼워 넣은 상태였고, 독일 측은 외무상 리벤트로프(Ribbentrop)만
이 나타나 매우 우울하고 썰렁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한다. Bernd Martin, Ibid, p. 29.
19) BA Kobl R 64 IV/76, p.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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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영화 상영 행사
독일협회의 자료에는 영화 관련 자료만 따로 보관되어 있지 않고, 각 지역별 행사
자료나 연도별 행사보고서에 산발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전체를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특히 영화 상영을 위한 행사 준비는 공식적 연회의 형식을 갖춘 연주
회나 강연회에 비해 비교적 간단했으므로, 문서상으로 간략한 정보만 남아 있다.
나치독일에서 일본영화로 거론되는 첫 영화는 일본과 독일의 합작영화 「사무
라이의 딸」(Die Tochter des Samurai)이다.20) 산악영화와 스키영화 장르에서 독보
적인 감독 아르놀트 판크(Arnold Fanck)가 일본에서 제작한 것인데, 1937년 3월
23일, 처음으로 독일에서 상연되었다. “독일과 일본의 친교를 위한 초석을 놓은”
영화라는 평21)을 받은 이 필름의 내용은 이렇다. 유럽에서 8년간 유학한 일본청년
데루오(輝雄)가 고향에서 자신과의 결혼을 기다리는 양아버지의 딸 미치코(光子)
대신 금발의 멋진 독일 여기자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상대를 스스로 정하려 한다.
자존심이 상해 절망한 미치코는 화산에 뛰어들기 위해 후지산으로 가는데, 데루오
는 이를 알고 급히 그녀를 찾으러 산꼭대기로 달려간다. 결국 화산이 폭발하기 직
전 미치코를 구해 내어 두 사람은 행복하게 결혼하고, 만주로 가서 새로운 땅을 개
척하며 ‘국가의 기본이 되는 가정’을 꾸린다는 내용이다.22) 서구문물의 모던한 삶의
스타일에 익숙했던 데루오가 땅을 강조하고, 농사를 지으며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것을 최선의 삶이라고 강조하는 메시지는 이 영화가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한 것
임을 여지없이 보여 준다.
나치제국에서 모든 영화는 상연되기 전에 독일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이 영화는 “국가 정책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판정을 받았으며, 특별 시사회에 괴벨
20) 주인공은 하라 세쓰코, 루트 에벨러(Ruth Eweler), 고스기 이사무, 하야카바 세슈에였다. 음악은 유명한 일본작곡가 야마
다 고사쿠가 작곡하였고, 1937년 8월에 직접 지휘하는 연주회도 개최하였다. BA Kobl R 64 IV/ 4, p. 197.
21) BA Kobl R 64 IV/ 67, 208.
22)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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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는 물론이고, SS의 대장인 힘러와 하이드리히 등 나치 최고 권력자들이 대거 참
관하였다.23) 참고로 「사무라이의 딸」의 일본어 버전은 「새로운 대지」(新しき土)라
는 제목으로 독일보다 한 달 정도 앞서 2월에 도쿄에서 상영되었다.24)
「사무라이의 딸」 이후 독일협회 문서에는 일본영화에 대한 언급이 점차 많아
진다. 일본의 영화제작 기술이 향상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전쟁으로 인해 영화제
작의 필요성이 더 절박했을 수도 있으나,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
가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1939년 4월 18일 베를린에서 특별시사회에서 선보인 노
무라 고쇼 감독의 스키 영화 「성스러운 목표」(Der heilige Ziel)도 “국가 정책적으
로 가치가 있다”는 판정을 받고, 전쟁이 발발한 후 1942년 2월부터 독일 영화관에
서 상영되었다. 하지만 스키인의 성공에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너무 과장되고 설
득력이 희박한 설정을 하는 등 예술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25)
반면 요미우리신문사에서 1937~38년 중일전쟁을 주제로 한 선전영화 「성스
러운 전쟁」(Der heilige Krieg)은 전쟁 발발 2개월이 지난 1939년 11월 첫 선을 보
인 후, 프랑크푸르트, 쾰른, 빈, 브레슬라우, 마그데부르크 등 독일 전 지역에서 상영
되었다. 또한 1940년 일본의 국제문화진흥회에서 지원하여 만든 문화영화 「일본
의 국민학교」(Japanische Volksschulen)는 일본 산간 지방 마을의 국민학교에 관
한 영화인데, 전쟁이 불리하게 진행되는 1944년 가을까지도 독일에서 계속 상영되
어 선전용 영화로서 역할을 착실하게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본영화는 재미가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독일관객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는 1941년 야먀모토 가지로(山本嘉次) 감독의 <이네와 말>(Ine
23) “Triumph deutsch-japanischer Arbeit”, Berliner Lokalanzeiger, 1937. 3. 24. BA Kobl R 64IV/ p. 272, 208.
24) 野村光一, 「「新しき土」とその音樂」, 『音樂評論』, 1937, pp. 34~35.
25) Günther Haasch(Hg.), Die Deutsch-Japanischen Gesellschaften 1888~1996, p. 256.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327
und ihr Pferd)이다.26) 북부 일본의 농가를 배경으로 한 것인데, 농부의 딸 이네가
사랑으로 키우는 조랑말을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군대에 팔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시
작하여, 이네는 팔려간 말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장에
서 일을 하지만, 마침내 말을 되사와도 선생님의 권유로 군대에 되팔게 된다. 가족
의 빚을 없애고, 말은 조국에 봉사하게 된다는 결말이다.27)
그 외에도 1942년 「일본의 사나운 독수리」(Nippons wilde Adler)
28)나 「떠오
르는 태양의 나라 일본」(Nippon-Land der aufgehenden Sonne)
29)과 같은 선전 영
화가 독일협회 행사에서 상연되었다. 또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다큐멘터리영화로
만든 「하와이로 가는 길」(Der Weg nach Hawaii, 1943)은 1944년 12월, 마그데부
르거에서 학생들과 공군, 그리고 일반인들을 포함하여 약 5,300명 정도가 관람하
였다.30) “독일관객에게 매우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독일협회의 베를린 총무는 기
록하고 있지만,31)독일이 폐허가 되면서 어느 정도로 영화 관람이 가능했는지 자세
한 사항은 알 수 없다.
나치독일에서는 본영화 상영 전에 항상 뉴스영화(문화영화)를 먼저 상영했는
데, 본 논문에서 언급되지 않은 일본에 관한 독일뉴스영화가 베를린 국립 영상물
보관소(Filmarchiv)에 다수 소장(10편 이상)되어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다음 기회
로 미루고자 한다.
26) 영화상영 허가는 당국으로부터 ‘1942~1943년까지로’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27) BA Kobl R 64/ IV 156, p. 43. 이 영화가 현재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2008년 5월 한국영상자료원 학술대회에서 만
났던 일본의 국립필름센터장 오카지마 히사시 씨도 이 영화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28) 감독은 아베 유타카이고 일본어 버전은 「불타는 하늘」(もゆるおぞら)인데, 히틀러에게 일본군대가 선물하고자 하는 의
미에서 독일버전이 만들어졌다. 내용은 중국을 공격하는 일본공군을 묘사한 것이다. Günther Haasch(Hg.), Ibid, pp.
260~261.
29) 이 영화는 태평양전쟁 1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에서 1942년 12월 7일 베를린에서 상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BA Kobl
R 64 IV/ 176, pp. 177~178.
30) BA Kobl R 64 IV/ 228, pp. 4~5.
31) 1945년 1월 5일. 트뢰멜이 일본대사관 문화부에 보낸 문서. BA Kobl R 64/ IV 228, p. 4.
일본비평 2호
328 연구논단
3. 나치제국에서 일본 음악가들의 활동과 레퍼토리
프로파간다 영화가 광범위한 대중을 대상으로 삼았다면, 교양층을 겨냥한 클래식
음악연주회는 양적인 영향력은 훨씬 작았겠지만, 공식적인 제스처를 담은 국가 간
문화행사로서 그 위상은 매우 높았다. 물론 이것은 거의 모든 엄숙한 국가적 행사
에서 클래식 음악이 사용되는 것에서도 보듯이, 단순히 나치시기에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예술음악은 국가적 차원에서 독일과 일본의
음악교류에 분명 독특한 역사를 가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역사도 뿌리 깊은데,
1880년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君が代)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독일
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프로이센 군악대 출신)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32) 일본에서 공식적 차원의 서양음악 이미지는 독일 음악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
음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33)
나치제국의 독일 음악인들이(나치들이 파견했건, 나치들에 쫓겨 온 망명음악가
들34)이건) 전쟁 중 일본 음악계에서 영향력을 넓혀 가는 동안,35) 이와 양상은 다르지
만, 독일에서의 (특히 1938년 문화협정 이후) 일본 음악인들의 활동도 점차 활발해
져 갔다. 독일협회 문서로 보는 일본 음악가들의 연주회 활동은 확실히 1938년 이
후 점차 많아지다가 전쟁 동안, 특히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동안(1939~1942)에 절
정을 이룬다. 폭격이 심해지고, 독일군이 궁지에 몰리게 되는 1943년부터 1945년
까지는 점차 물적, 인적 자원이 부족한 가운데, 전반적으로 행사 건수도 줄어들고,
32) Hermann Gottschewski, “Hoiku shoka and the melody of the Japanese national anthem Kimi ga yo, 東洋音楽
硏究, 제68호 (도쿄 2003. 8.) 참고.
33) 물론 1887년 도쿄에 설립된 우에노 도쿄음악아카데미는 초대 원장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 때문에 영미식 모델이
추구되었고, 1930대 초반까지도 프랑스 음악의 영향도 강하였다. 다시 말해 1933년 독일과 일본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일본 음악계에서 그래도 다양한 서구의 영향이 공존해 있었다 할 수 있다.
34) 유대인음악가들은 전세계로 흩어지면서, 어디든 자신들을 받아 주는 곳으로 망명하였는데, 일본은 유럽의 유대인에게 쉽
게 입국을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국립음악기관인 우에노 도쿄음악아카데미의 교육인력 중에서 1930년대 이후 독
일인이 외국인 중 가장 많은 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35) 김지선, 「근대시기 일본의 음악학교에 유학한 조선인 — 도쿄 음악학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사학보』, 한국음악
사학회, 2008년 41집, 167쪽.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329
이에 따라 보고서도 얇아져 간다. 하지만 일본 지휘자 고노에 히데마로36)나 스바 네
지코 및 다나카의 연주회는 1944년/1945년 초에도 기획되었음이 독일협회 문서
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이 독일 사람들 앞에서, 특히 전쟁으로 지치고, 상처 입은
상이군인들 앞에서 지휘하고 연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어떤 일본인
이 독일의 청중 앞에서 설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으며, 이들은 어떤 음악을 왜 연
주했는가?
1) 제3제국에서 활동한 일본 음악가
일본 음악가가 나치제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정부기관이나 문화기관을 통해서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보낸 음악
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원래 음악공부를 하기 위하여 개인적인 차원에서 유럽에
갔다가 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과 독일의 동맹관계로 인해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하
게 되자, 늘어나는 음악행사를 위해 독일에 체류하면서 일본 대사관 및 영사관, 그
리고 독일협회와 협력하게 되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A)는 고노에 히데마로뿐
인데,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독일과 일본 간의 음악관련 문제에 있어서는 “독불장
군”37)으로 알려진 고노에 히데마로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하겠다. 후자(B)에는 오타카 히사타다, 안익태, 스바 네지코, 다나카 미치코 등
이 속한다.38)
36) 그는 1942/43년 연주회 수익금 3만5천 제국마르크(현재가치로 약 3억~3억 5천만 원에 해당함)를 모두 독일적십자에 헌
금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고자 였다.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161쪽 참고.
37) 고노에를 직접 알았던 일본 음악가 도쿠마루 요시히코(德丸吉彦) 교수의 증언. (2008. 11. 15. 일본 도쿄무사시노음대에서
개최된 일본동양음악학술대회에서 필자와의 대화)
38) 야마다 고사쿠(山田耕筰)와 기시 고이치도 베를린에서 유학하고 지휘자, 작곡가로서 데뷔를 했지만, 1934년 귀국한 고
이치는 3년 후 급거하였고, 야마다는 1937년 「사무라이의 딸」 영화 음악 연주회를 베를린에서 지휘하여 독일 쪽의 인정
을 받아 2개의 오페라소품을 지휘할 기회가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동년 10월 일본으로 귀국하여 독일에서 더 이상 활
동하지 않게 되므로 여기서 논외로 한다. 또한 독일협회 자료에 남아 있지 않은 일회적인 초청연주회도 있었겠지만, 여기
서는 독일협회 자료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음악가들만 다루었다.
일본비평 2호
330 연구논단
A. 지휘자 겸 작곡가 고노에 히데마로39)
먼저 전자의 예로 고노에 후미마로의 막내동생이었던 고노에 히데마로는 1925
년 도쿄에서 일본 최초 국가재원의 NHK방송교향악단 설립을 추진하였던 음악계
의 실력가였으며, 지금도 20세기 전반의 일본음악사에서 중요한 음악가로 인정받
고 있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를 중퇴하고 당시 일본 음악계의 대부인 야마다 고사
쿠(山田耕筰)에게서 작곡을 수학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유명한 지휘자 에리히 클
라이버(Erich Kleiber), 작곡가 막스 쉴링거(Max Schillinger)와 뱅상 당디(Vincent
d’Indy)에게 배웠으며,40)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 리하르트 슈트라
우스(Richard Strauss)와 같은 유명한 음악가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아시아인 중에
는 매우 드물었던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935~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
최 전에 일본가무단을 이끌고 독일에 왔던 그는 일본의 오페라 아카데미를 설립하
려는 계획 등에 열성적으로 관여하면서41) 지휘자로서뿐 아니라, 음악행정가로서
도 왕성하게 활약하였다. 그는 당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두번째
일본인이었으며,42) 20세기 전반 이 독일 최고 오케스트라를 가장 자주 지휘한 일본
음악가에 속한다. 전쟁 중에는 독일적십자와 함께 전선과 점령국을 돌면서 사례금
도 받지 않고 독일 상이군인 위문 연주회를 지휘하였으며, 일본제국의 대표 지휘자
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39) 五味絃子・松原正(編) 外, 『音楽家人名事典』, 244쪽.
40) Morihide Katayarna, Japanes Orchestral Favourites—Ifukube, Akutagawa, Toyama : Naxos 8.555071(Booklet),
2-3.
41) BA Berlin R 55/ 20562. 일본 국민 오페라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일본 쪽의 욕망과 제3제국의 문화적 프로파간다를 극동
에 확실하게 보여 주고자 하는 독일 쪽의 의도가 부합하여, 극예술 아카데미와 오페라하우스의 건립이 추진되었으나(고
노에와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郎), 엄청난 비용의 문제로 흐지부지되었다. 베를린 문서 보관소에는 1937년 7월 11일부터
1938년 1월 5일까지 이 문제와 관련된 4장의 편지와 자세한 계획서가 소장되어 있다.
42) 고노에가 1924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지휘자로 데뷔를 하였지만, 학생의 신분으로 자비를 들여 한
것이므로, 처음 지휘한 일본인은 기시 고이치(1934)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331
B-1. 지휘자 겸 작곡가 오타카 히사타다와 안익태
고노에를 제외하면, 위에서 언급된 음악가들 모두 개인적 차원에서 음악공부를 위
해 유럽에 왔다가 독일에서 활동하게 되는 경우인데, 지면상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
다. 젊은 작곡가 오타카43)는 1931~1932년 빈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1934년 빈 국립음악원에서 정식으로 작곡 공부를 하던 중, 1937년 펠릭스 바인가
르트너(Felix Weingartner)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상은 1937년 5월 말, 빈의 유
명한 작곡가이자 빈 궁정 오페라의 지휘자였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가 일본에 초
청되어 방문했을 때, 뛰어난 일본작곡가를 발굴하기 위해 작곡가상을 제안하였는
데,44) 수상한 작곡가에게는 빈에서 직접 작품 초연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 상으로
오타카는 1939년 빈 필하모니에서 자작곡을 지휘하게 되어 유럽 최고 음악계에
데뷔하였던 것이다. 또한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도 ‘일본현대음악 연주회’(1939. 12.
10)를 성공적으로 해내어 유망한 일본지휘자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오타카는 고노
에와 달리 독일에 오래 머물지 않고 1940년 귀국하여 도쿄 NHK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1942년부터 사망하는 1951년까지) 계속 활동하게 된다.
코블렌츠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그는 (독일협회 총무에게 보낸) 편지 내
용에서 독일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음악의 중심
지 독일제국에 더 머물지 않고 귀국했는지 의문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한 자료 수집과 함께 차후에 탐구하고자 한다.45)
안익태도 오타카처럼 유럽에 유학을 왔지만, 오타카와 달리 귀국하지 않고 전
43) 그의 장남(尾高惇忠)은 작곡가로, 차남(尾高忠明)은 유명한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피아니스트였던 부인(尾高節子), 그
리고 유명한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요르크 데무스(Jörg Demus)의 제자였던 둘째 며느리(尾高ユキ子)도 피아니스트이다.
『音楽家人名事典』, 138~139쪽.
44) Josef Kreiner(Hg.), Japan und die Mittelmächte im ersten Weltkrieg und in den zwanziger Jahren, p. 212. 바인
가르트너는 한 달가량 체재하면서 11개의 연주회를 지휘하였다.
45) 일본지휘자가 귀한 상황에서 인정받는 젊은 지휘자 오타카의 존재는 환영할 만한 것이었으나,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이
유는 (자신 외에 다른 일본지휘자를 인정하지 않고자 한 독불장군) 고노에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일본비평 2호
332 연구논단
쟁이 끝날 때까지 버틴 경우이다. 1930년 일본 유학을 마친 후,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적 발전을 위해 다시 1938
년 유럽으로 간다. 부다페스트의 음악아카데미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하던 중, 동부
유럽의 이곳 저곳(부다페스트, 부쿠레슈티, 벨그라드, 소피아 등)에서 지휘를 하게 되
고 좋은 반응을 얻게 되었다.46) 하지만 1941년 10월 부다페스트 일본영사관의 귀
국하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47) 안익태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음악의 중심
지인 독일 본토로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1941년 7월 전후, 처음으로 베를린의 독
일협회 문서에 안익태의 이름이 에키타이 안(Ekitai Ahn)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후
독일협회와 연관된 연주회(베를린, 빈, 함부르크, 하노버 등)에서 일본지휘자로 명성
을 쌓아 간다. 1943년이 되면, 고노에 히데마로 외의 유일한 일본지휘자로 활동하
던 안익태가 오히려 고노에보다 더 독일 음악계의 인정을 받게 된다.48)
참고로, 그동안 (거의 절대적이었다 할 수 있는) 애국자로서의 안익태 이미지는
나치시기 활동에 대한 새로운 자료 발굴49)로 인해 수정될 수밖에 없을 터이지만, 다
른 한편, 일제가 프로파간다에 이용하기 위해 식민지 출신 음악가를 후원함으로써
안익태와 같은 국제적인 음악가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점은 식민지 시기 음악문화
연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B-2. 여성음악가 다나카와 스바
전쟁 시기 독일제국에서 일본 음악가로 왕성한 활동을 벌인 여성음악가 다나카와
46) 1941년 부쿠레슈티에서의 연주회가 성공적이었다는 보고서가 일본외무성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www.jacar.
go.jp).
47) BA Kobl R 64 IV/209, p. 74.
48)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베스터만(Gerhart von Westerman)이 고노에보다 안익태를 음악적으로 더
인정한다는 편지가 코블렌츠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
162~163쪽 참고.
49) 송병욱, 「안익태의 알려지지 않은 두 작품」, 『객석』, 2006년 3월호, 86~89쪽 ; 송병욱, 「안익태의 민족 정체성 ─ 어느 음
악가의 정당한 평가를 위하여」, 『객석』, 2006년 4월호, 86~90쪽(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333
스바도 후자의 경우이다. 1930년 도쿄음악학교 성악과를 중퇴하고 빈 국립음악학
교에 유학한 다나카의 화려한 음악활동은 결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31년 30
세 연상의 빈의 부유한 사업가(“커피의 왕”이라는 별명이 있었음)와 결혼하여 남편의
지원으로 원하는 대로 음악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50) 그러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
병(1938) 및 전쟁 발발 이후에는 독일에서 독일협회가 관여하거나 주최한 성악독
주회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전쟁 후에도 일본으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에서 일본유
학생들을 돕고 후원하는 ‘민간 대사’의 역할을 한다.51)
스바 네지코도 유학 왔다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독일회의 프로파간다 음
악회를 위해 활약하였던 경우이다. 어린 나이에 ‘천재’의 재능이 인정되어(12세에
리사이틀을 함) 1936년(15세) 벨기에 외교관의 추천으로 벨기에에 유학한다. 그리
고 1938년 이후 파리에서 유학하던 중,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자 1942년 다
나카 미치코의 도움으로 독일로 와서 바이올린 독주자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다.
스바는 1943년 10월과 1944년 10월에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지휘:
크나페르츠부슈)했을 뿐 아니라, 괴벨스로부터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을 선물 받는
등 독일 청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에 다나카 미치코가 심하게 질투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독일협회 문서에도 나타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졌다.52) 1945년 종전
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1960년부터 연주계로부터 거의 자취를 감
추다시피 한다.53)
오타카를 제외하고 여기서 언급된 음악가들은 모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
에 머물면서 일본 음악가로 활동했으므로, 전쟁 후에는 모두 미군정의 조사를 받게
50) Josef Kreiner(Hg.), Japan und die Mittelmächte im ersten Weltkrieg und in den zwanziger Jahren, Bonn :
1986, p. 212. 1937년에는 프랑스 영화에도 출연했다. 五味絃子・松原正(編) 外, 『音楽家人名事典』, 374쪽.
51) 五味絃子・松原正(編) 外, 같은 책,
52) BA Kobl R64 IV/182, p. 99.
53) 五味絃子・松原正(編) 外, 『音楽家人名事典』, 323쪽.
일본비평 2호
334 연구논단
되지만 무혐의로 풀려난다. 이들이 어떤 경로로 독일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건, 독일
에서 연주활동을 한다면 직접 간접으로 나치 프로파간다 임무에 적극적이었던 독
일협회와의 접촉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2) 일본 음악가들의 레퍼토리
독일에서 일본 음악가들은 어떤 음악을 연주했는가? 여러 형태의 연주회가 있었고,
그래서 여러 가지 레퍼토리가 연주되었지만, 크게 보아 일본 음악가들의 연주회는
3가지 유형을 보인다.
첫째, 가장 흔한 유형으로 대부분의 레퍼토리는 서양음악, 특히 독일작곡가의
음악으로 구성하고 양념으로 일본 음악을 한 곡 정도 끼워 넣는 형태이다. 이때 일
본 음악은 일본의 전통음악이 아니라, 현대화된, 즉 유럽화된 일본현대음악을 의미
한다. 다시 말해, 일본의 현대작곡가의 작품이나, 일본 전통음악을 유럽화한 편성
또는 화성을 덧붙여 편곡한 것을 의미한다. 첫번째 유형의 예로 안익태의 연주프로
그램을 들 수 있다.
유형 1) 안익태 지휘의 1943년 8월 18일 19시, 베를린 필하모니오케스트라연주회54)
리하르트 바그너 …………………………… 리엔치 서곡
안익태 ……………………………………… 에텐라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피아노협주곡 d단조, KV.466
(피아노: 다그마 벨라)
*휴식
안토닌 드보르자크 ………………………… 심포니 5번 e단조, 「신세계」
54) 1943년 3월 30일 함부르크 연주회에서도 안익태는 베토벤의 에그몬트서곡, J.S.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자작곡 에텐라
쿠, 드보르작의 심포니 5번 e단조를 레퍼토리로 지휘했다. BA Kobl R64 IV/180, 322.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335
약 11분에 불과한 「에텐라쿠」(越天楽)
55)를 제외하면 모두 독일 음악인 바그너,
모차르트 그리고 나치제국에서 높이 평가되었던 체코 음악가 드보르자크의 서양
음악이다. 안익태의 곡은 8세기 일본궁정음악 가가쿠(雅楽) 중 가장 유명한 「에텐
라쿠」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일본적 색채를 암시하긴 했지만, “심포니적 판타지”라
는 소제목을 가진 유럽적 음악이다. 나치제국에서 연주한 안익태의 연주회는(발굴
된 자료의 범위에서 보면) 모두 이 유형에 속한다.
또 다른 예로 1939년 6월 15일 베를린연주회 행사의 이름은 ‘독일-일본-공동
연주회’이지만, 실제 레퍼토리는 독일 음악에 치중했다. J. S. 바흐, 야마다 고사쿠(山
田耕筰) 편곡의 일본민요, 슈베르트, C. Ph. E. 바흐, 브람스, 헨델로 구성되어 있는
데,56) 이때 독주자(피아니스트, 성악가)와 지휘자가 모두 일본인이었다는 것은 독일
편중의 레퍼토리를 어느 정도 보완하는 의미는 있었을 것이다.
둘째, 순전히 유럽음악 레퍼토리로만 구성된 형태이다. 고노에 히데마로의 연
주회가 종종 그러했는데,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바그너 등 독일 지휘자들이 연주
하는 레퍼토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유형 2) 고노에 지휘, 1942년 9월 16일 드레스덴연주회57)
칼 마리아 폰 베버…………………………마탄의 사수 서곡
로버트 슈만 ………………………………라인 심포니
*휴식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리하르트 바그너 …………………………마이스터징어 서곡
55) 안익태의 「에텐라쿠」 악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해방 후 갑자기 나타나는 「강천성악」(연주시간 10분)과
같은 것이라 추정된다.
56) BA Kobl R 64 IV/69, p. 288.
57) BA Kobl R 64 IV/81, p. 77. 물론 고노에도 안익태처럼 독일작곡가의 작품에 자신의 에텐라쿠를 넣어 지휘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1942년 6월 14일 바이마르 연주회, 1942년 5월 29일 단치히에서의 연주회, 4월 27일 포젠에서의 연주회)
일본비평 2호
336 연구논단
또 고노에가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연주한 1940년의 10월 18일 연주회도 마
찬가지인데, 글린카, 리스트, 베토벤, 볼푸르트를 프로그램으로 하는 등 모두 서양
음악레퍼토리이다.58) 이는 바이올리니스트 스바 네지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지휘자 크나페르츠부슈)와 협연한 1943년과 1944년
의 프로그램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곡은 아예 없고, 헨델, 브람스, 슈만으로만 구성
되어 있다.59)
셋째, 매우 드물긴 하지만, 일본 현대 음악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는 연주회
형태도 있었다. 이 경우는 지휘자뿐 아니라, 음악도 일본인의 것으로 채워져 ‘일본
연주회’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특별한 연주회의 예는 오타카
가 빈에서 또는 1939년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지휘한 경우이다.
유형 3) 오타카 지휘, 1939년 12월 10일 19시 30분, 베를린 필하모니오케스트라연주회60)
칸틸레네 안티케 …………………………… 히라오 기시오
모음곡 2번…………………………………… 오타카 히사타다
파사칼리아 ………………………………… 요한 세바스찬 바흐(레스피기 편곡)
*휴식
에텐라쿠 …………………………………… 고노에 히데마로
이미지(가가쿠의 모티브에서) ……………… 시바 스케히로
아시야 오토메(아시야의 소녀)……………… 오타카 히사타다
이 연주회에서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 곡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 현대음악가들
58) Peter Muck (Hg.), Einhundert Jahre 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Darstellung in Dokumenten, 3. Bd.,
: Tutzing 1982, p. 298.
59) Peter Muck (Hg.), 같은 책, pp. 309~310.
60) Peter Muck (Hg.), 같은 책, p. 293.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337
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인 레스피기가 편곡한 요한 세바스찬 바
흐의 곡이 하나 들어간 것인데, 유형 1과 정반대 구성이다. 이 연주회는 삼국동맹
체결 전의 것이라 직접적으로 삼국동맹과 관련짓기 힘들지만, 바흐 곡을 웅장하고
장엄한 스타일로 편성한 레스피기 버전을 선택한 것은 나치제국의 미학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 음악가를 내세운 ‘독일-일본 공동연주회’가 아니어도, 독일 음악
가들이 적극적으로 일본 음악을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데사우 현악사중주단
(Dessau Streichquartet)
61)이나 피아니스트 우도 댐머르트(Udo Dämmert)와 같은
음악가들은 일본작곡가의 음악만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하여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
다. 그런데 독일협회 문서의 정보를 보면, 데사우 현악사중주단이 일본 음악에 관심
을 가지고 독일협회에 연주회를 제안한 것은 (1938년 일본과 독일의 문화협약시기
이후인) 1939년 6월이었고,62) 피아니스트 댐머르트가 제안한 시기는 1943년 7월
인 것63)이 눈에 띈다. 일본과 독일의 동맹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은 가운
데, 전쟁으로 연주할 기회를 점차 잃게 된 독일 연주자로서 틈새시장을 공략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3) 유럽화된 일본전통음악의 프로파간다적 가치
다시 정리해 보면, 독일협회에 남겨진 문서로만 볼 때, 일본 음악가의 레퍼토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는 일본 음악인들은 오리지널 일본 전통음악이나 일
본 대중가요를 연주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의 현대음악, 즉 유럽에서 서양음악을
공부한 일본현대작곡가들의 예술음악은 양념으로 한 곡씩 연주하는 정도에 그칠
61) 1941년 11월 26일 데사우 사중주단은 빈 독일협회의 행사로 오타카, 고부네, 히라오 작품만으로 구성된 일본 실내음악의
밤을 개최하였다. BA Kobl R 64 IV/181, p. 174.
62) BA Kobl R 64 IV/80, p. 43.
63) BA Kobl R 64 IV/167, p. 74.
일본비평 2호
338 연구논단
뿐, 일본 음악과 일본 음악인의 것을 연주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나치제국에서 일본을 음향적으로 상징하는 일본 음악회에서 주
로 연주되는 것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한다면 거의 항상 독일예술음악이었다
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 음악인은 오히려 독일 음악을 연주하는 데에 매우 적
극적이었다. 이를 상호 음악교류라고 할 수 있는가? 대등한 입장에서 보면, 일본연
주회나 일본-독일 공동연주회에서는 당연히 일본 음악이 반을 차지하는 것이 논리
적이겠지만, 실제로는 거의 독일 음악으로 레퍼토리를 선정한 것을 보면 음악 자체
보다는 연주자와 지휘자가 까만 머리의 일본인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것 같다.64)
왜 나치제국에서 일본음향을 대표하는 일본 음악가들은 자국인이 만든 일본
현대음악이나 일본의 전통음악을 적극적으로 연주하지 않았을까? 일본인의 음악
만으로 된 연주회가 드물었던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물론 일본 대중음악은 공식적
인 영역에서 적당하지 않았을 것이니 여기서 논외로 한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첫째, 우선 매우 실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전통음악은 음악적 어법이 전혀
익숙지 않은 독일청중에게 이해되기 힘든 지루한 것이었으므로, 독일에서 호의적
인 반응을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국제적이라 하지만, 일본 전통음
악의 어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 청중에게는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였다. 한편
으로 문화 정치적 요구를 채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청중이 싫어하고 이해하지 못하
는 음악을 계속 나열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리라. 문화 정치적 행사라는 의무적인
차원이 아니라면, 또 일본 전통음악이 어떤지 한번 들어 보자는 호기심의 차원으로
한두 번 기획하는 것을 넘어서 이런 음악회를 자주 개최하는 것은 독일 측에 부담
64) 안익태가 하노버에서 독일-일본 공동연주회에서 지휘를 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1부는 일본 지휘자가, 2부는 독일
지휘자가 나서는 연주회였는데, 일본 지휘자로서 안익태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J. S.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그리고
자신의 「에텐라쿠」를 지휘하였다. 독일인 헬무트 티어펠더(Helmut Thierfelder)가 지휘하는 2부는 당연히 모든 곡이 독일
음악이었다. BA Kobl R 64 IV/181, p. 39.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339
이 되었을 것이다.65)
둘째, 이것은 분명 청중의 선호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전쟁 시기라는 시대적,
정치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일본의 전통음악은 음향적으로 그리 유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근대화가 진행될 때, 시각 못지않게 청각도 감각의 변화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라디오, 확성기와 전화벨 소리, 자동차와 기차, 공장에서 나오는 소
음 등이 근대화된 사회를 청각적으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와 대조
적으로 전통음악은 근대화 이전의 구시대와 연결되는 것이 당연했다. 다르게 말하
면, 근대화된 일본의 이미지를 음향적으로 전시하기에 전통음악은 불리했다고 볼
수 있는데, 독일의 동맹국으로서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할 수 있는 강한 일본제국
을 상징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렇다고 낯선 일본적 음향이 필요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안익태는 독일
협회가 관여한 음악회에서 일본 음악으로 거의 매번 「에텐라쿠」66)를 내세웠던 것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적 취향이 넘치는 음악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너무 일본
적인 음악보다 ‘유럽화된 전통’, 즉 서양식 음악어법에 일본 색채만 덮어씌운 음악
이 더 적당했다. 실제로 일본 음악인이 일본적 요소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서양
음악만으로 독일 음악인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또
독일 측에서 볼 때, 그런 음악가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독일제국에서 요구되
는 일본 음악가들의 음악적 선택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일본 음악가 개인의
개성보다는 정형화된 일본 이미지로 덧씌워진 ‘서양화된 음악’을 연주하는 것만이
65) 일본 전통음악 연주가가 독일에 거의 체류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가부키 및 전통가무단이 초청되어 베를린
에서 공연한 것을 볼 때, 독일에서 일본전통음악에 대한 프로파간다적 수요가 실제로 많았다면 전통음악인들도 고노에
처럼 오래 체류하였을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현재 연구 상황에서는 이 점을 확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66) 아직 악보도 녹음자료도 발굴되지 않은 안익태의 「에텐라쿠」를 「강천성악」과 같은 곡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강천성악」의
주선율이 고노에의 「에텐라쿠」 선율과 같고, 제목 “강천성악”의 의미도 ‘越天樂’, ‘Musik vom Himmel’(독일협회 문서에
적혀 있음)과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강천성악」은 1945년 이후, 안익태의 레퍼토리에서 갑자
기 자취를 감춘 「에텐라쿠」 대신 갑자기 등장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일본비평 2호
340 연구논단
요구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리지널 「에텐라쿠」를 유럽 악기로만 바꾼 고노에의 「에텐라
쿠」67)보다 선율과 음색은 낯선 일본적 요소를 가졌지만 ‘심포니적 판타지’라는 부
제의 서양음악인 안익태의 「에텐라쿠」가 오히려 근대화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
는 힘센 국가 이미지를 주는 데 더 적합한 일본 음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 후,
이러한 프로파간다적 맥락이 사라지자, 일본 전통음악을 그대로 잘 보존한 고노에
의 「에텐라쿠」가 더 자주 연주되고 더 유명하게 되었다.68)
4) 나치제국에서 일본 음악가의 프로파간다적 가치
그렇다면 이러한 서양음악레퍼토리에 치우친 음악회에서 일본 음악가들은 독일과
일본의 문화교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나치프로파간다의 입장과 일본제국의
입장이 얽혀 있으므로, 네 가지로 나누어 서술해 보자.
첫째, 일차적으로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일본 음악가들은 일본과 독일의 친밀
한 관계를 음향적으로 과시하여, 삼국동맹의 정치적 의미를 문화적으로 보여 주는
역할을 했다 할 수 있다. 어떻게 삼국동맹의 강한 단결을 과시할 수 있는가? 단순히
말이나 선언보다 문화 행사를 통해서 오히려 효과적으로, 감정적으로 잘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노에와 안익태는 자주 삼국동맹 연주회에서 일본의 대표로
나가서 지휘하였다.
둘째, 일본 음악가들이 주로 독일 음악을 연주한 것은 독일 쪽의 입장에서 보
면, 독일 음악이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환영
67) 1943년 3월 28일자 함부르크의 한 신문 비평에서는 고노에를 “일본에서 독일 음악의 선구자”로 칭하고 그의 「에텐라쿠」
를 드뷔시(Claude Debussy)처럼 인상주의적인 음색이라고 평했다. BA Kobl R 64 IV/81, p. 39.
68) 고노에의 「에텐라쿠」는 (1931년 모스크바에서 초연된 이래) 전세계 50개 이상의 도시에서 연주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현
대음악의 대표곡 중 하나로 자주 연주된다. 친일 대 애국의 맥락에 처하게 된 안익태의 「에텐라쿠」는 이제 그의 레퍼토리
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341
했을 것이다. 독일 청중은 전혀 생활양식이 다르고 전혀 문화가 다른 일본인이 독
일 음악을 이 정도나마 연주해 내는 것을 감탄하기도 하면서 ‘판단하는 입장’에서
흡족해 하였다. “독일은 음악의 나라”, “독일인은 음악적으로 뛰어나다”라는 주장
을 일본인 연주자들이 몸으로 증명해 주었으므로, 나치 프로파간다에도 유리했다
할 수 있다.
셋째, 일본 음악가들은 서양음악과 현대화된 일본 음악을 연주하면서 일본제
국의 ‘음악적 외교관’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기모노와 사쿠라의 이미지를 풍기
기는 하지만, 동시에 군복과 잠수함과 최신 장비를 갖춘 근대화된 강한 일본제국의
이미지를 음향적으로 과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넷째, 전쟁 중에 이들의 연주회는 더욱 많아졌고, 그 역할도 더 중요해졌는데,
음악은 전쟁에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군인들의 기분전환을 위해 이용되었고, 전쟁
에 피로해진 시민들을 위로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했다. 고노에, 다나
카, 스바 등은 오히려 전쟁 말기에 수많은 군인위로 연주회와 상이군인을 위한 연
주회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인 음악가의 위로는 독일인 음악가의 연주와는 다른 차
원이었을 것이다. 즉 독일 홀로 외롭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멀리 일본도 독일을 후
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암시할 수 있었다.
4. 끝맺으며
나치제국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는 한편으로는 일본 음악가의 활동범위가 문
화정책이라는 틀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음악의 나라 독일에서 음악적 실력만으로
승부하기 힘들었던 일본 음악가들에게는 국제적 커리어를 쌓는 기회를 제공하였
다. 일본과 독일의 친선연주회, 삼국동맹 기념 연주회, 일본과 독일의 공동연주회
등 수많은 행사는 음악가들에게 활동의 장을 넓혀 주고, 독일 음악가들과의 접촉
및 교류도 가능하게 해주는 고마운 일이었다. 특히 식민지 출신 안익태의 경우는
일본비평 2호
342 연구논단
전쟁과 삼국동맹이 음악가적 커리어를 위해 절호의 찬스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공식적 차원에서 보면, 나치제국에서 독일과 일본의 음악교
류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매우 독일에 치중된 것으로, 엄밀하게 말해서 교류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독일에서 일본 음악가는 정중하게 대해야 할 낯선 손님
의 위치에 있었고, 또 객관적으로 볼 때, 나치행사 및 프로파간다를 치장해 주는 장
식의 차원에서 취급된 듯하다. 일본 음악인들이 독일에서 음악활동을 하는 것은 독
일이 만들어 놓은 좁은 틀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과연 독일 음악가들도 일본제국에서 일본
의 음악프로파간다 정책의 장식물에 불과했는가? 일본에서 독일인들의 영향력과
역할은 어느 정도였고 그 양상은 어떠했는가? 전쟁 시기 두 나라의 음악문화교류
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 보기 위해서는 이 점도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언뜻 보기에도 일본에서의 독일 음악가들의 역할은 훨씬 복잡해 보인다. 독일
에서 일본 음악가들의 활동은 주로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 그쳤던 반면에,
일본에서 독일 음악가들은 공식적인 차원과는 별도로 일본 음악계에 매우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잠시 언급되었던 나치제국에서 쫓겨난 독일
망명 음악인들은 비공식적인 차원에서뿐 아니라, 공식적인 위치에서도 일본 음악
계에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예를 들면 1934년 방송을 통한 독일과 일본의 음악교
류에서 일본측의 지휘자는 (일본인이 아닌) 유대인인 클라우스 프링스하임(Klaus
Pringsheim, 도쿄음악학교 교수)이었다. 또 1940년 일본 황실 2600주년 기념 방송
에서도 유대인 망명음악가 만프레트 구를리트(Manfred Gurlitt)가 일본 측의 음
악가로 (일본의 입장에서) 라디오 연설을 하였다.69) 그리고 NHK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재직하면서 일본 교향악단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킨 요제프 로젠스톡
69) BA Kobl R64/ 58, 29.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343
(Joseph Rosenstock)도 마찬가지로 유대인 망명음악가였는데, 그는 일본 음악계의
존경을 받아 1946년까지 지휘자로 공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
는가? 일본은 망명음악음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라는 독일정부 측의 항의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일본에서 독일 음악가들의 역할과 음악적 교류는 독일에서의 경우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차후 연구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초록
373
자료의 해석에 원용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인 도리이(鳥居龍藏)와 이노(伊
能嘉矩) 등도 의심의 여지없이 고문헌들을 중요한 자료로서 구사함으로서 일본인류학의 새로
운 방법론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방법론을 가장 과감하게 심도있게 구사한 사람이
니시무라 신지라고 생각한다. 전파론을 습득하면서 인류학을 전개했던 니시무라는 산적한 고
문헌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문화의 전파를 설명하기 위한 자료들을 발굴하였다. 기능
주의가 횡행하던 1920년대 세계인류학계와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니시무라의 입장은 역사
주의 방법론이라고 명명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다만 그가 역사적 자료의 채택과 분석에
대해서 명시적인 방법상의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 그는 행동으로서 역사주의를
실천하였던 인류학자였다. 그러한 노력을 우리는 토착화의 시도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간판교수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학으로 시작하여, 신문과 잡지의 편집,
그리고 인류학, 일본사, 일본학으로 귀결된 메이지-다이쇼-쇼와의 학계를 잇는 대표적인 인류
학자였다. 니시무라 신지는 쓰보이(坪井正五郞)의 총합인류학의 내용을 승계하려고 노력한 사
례이기도 하며, 도리이 류조의 스타일과 지극히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도리
이는 동아시아인류학으로 자리를 잡았고, 니시무라 신지는 일본학으로 귀결되었다. 고대선박
과 고대경제에 대한 그의 문화인류학적 업적은 앞으로도 재조명되어야 할 여지를 충분히 남기
고 있고, 그러한 재조명이 일본인류학의 학문사와 학설사를 구축하는 기초적인 작업이 될 수
있기에 충분하다.
학문이 ‘국가학’으로 종속될 때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사례가 니시무라의 경우다. 쇼와 말기 대
동아전쟁의 대표적인 옹호론자였던 그의 입장은 “공존공영”, “사해동포”, “광역문화권” 등의
레토릭으로 포장되었고, 대동아전쟁의 데마고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해 온 문화인류학자 니
시무라 신지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의 심도있는 분석을 기다리고 있다. 말기 니시무라의 전쟁
인류학이 그의 필생의 작업이었던 문화인류학적 업적을 매몰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음악문화교류 :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에서 활동한 일본 음악가 | 이경분
투고일자 : 2009년 12월 21일 | 심사일자 : 2010년 1월 19일
독일과 일본의 교류사에서 그 어느 시기보다 활발한 교류가 일어났던 때는 아마도 제2차 세계
대전시기일 것이다.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정치・군사적으로 긴밀한 교류의
흔적을 남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음악문화교류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일본학계나 한국
일본비평 2호
374 ABSTRACT
학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독일 코블렌츠 연방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두 나라의 음악교류에 대해 4가지 관점에서 토론해 보았다. 첫째, 전쟁시기 독
일에서 활동했던 일본음악가들은 누구였는가, 둘째, 이들이 행한 연주회는 어떤 행사의 어떤
유형이있었는가, 셋째, 안익태와 고노에 히데마로가 자주 지휘했던 「에텐라쿠」와 같은 일본전
통음악이 가지는 프로파간다적 가치는 무엇이었으며, 넷째, 나치제국에서 일본음악가들의 프
로파간다적 역할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해명해 보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동맹국간의 문화교류라고 하지만, 일본음악가들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나
치제국의 문화・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장식하는 차원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반대의 경
우, 즉 독일음악가들이 일본제국에서 행한 다양하고 의미심장한 역할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
는데, 전체적인 음악교류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일본의 음악문화에 미친 독일음악가들의
영향에 대해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우애’정치의 사상과 실천 :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의 외교와 내정 | 도자와 히데노리
투고일자 : 2009년 12월 17일 | 심사일자 : 2010년 1월 12일
하토야마 유키오가 새 정부의 정치적 비전으로 제시한 ‘우애’의 사상적 기원은 유럽통합의 주
창자로서 알려진 쿠덴호프 칼레르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전에서 전후에 걸쳐 일본에서 쿠덴
호프 사상의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가지마 모리노스케, 하토야마 이치로, 그리고 창가
학회이다.
하토야마 이치로가 쿠덴호프의 사상을 접한 것은 전후 공직에서 추방되어 아타미에 머물 던
시기에 쿠덴호프의 저서 Totalitarian State against Man(1936)을 접한 것이 계기였다. 하토
야마 이치로는 이것을 번역하여 1952년 『자유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특히 그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혁명은 있었지만 우애를 위한 혁명이 없었다는 쿠덴호프의 말에 감명을
받아 번역서의 출판과 함께 일본우애청년동지회를 조직한다.
‘우애’ 사상이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의 외교 정책에 미친 영향은 동아시아공동체 구상과 미국
주도의 글로벌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 비판적이고 동아시아국가들과
의 관계를 중시하는 하토야마 정권의 외교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후텐마 기지’의 이전에서 보
듯이 미일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측면도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이런 갈등 상황이 어떻게 수
습될지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주창한 ‘자립과 공생의 원리’는 ‘우애’ 사상이 내정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91943/1/11_%EB%82%98%EC%B9%98%EB%8F%85%EC%9D%BC%EA%B3%BC%20%EC%9D%BC%EB%B3%B8%EC%A0%9C%EA%B5%AD%EC%9D%98%20%EC%9D%8C%EC%95%85%EB%AC%B8%ED%99%94%EA%B5%90%EB%A5%9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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